러시아 떠나지 않는 서방기업들
[세상읽기]
[세상읽기] 김양희 | 대구대 경제금융학부 교수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참상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데, 이 사안은 러시아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전쟁으로 인한 서방의 시선 분산과 유가 상승이 푸틴에게 훈풍이 되고 그만큼 우크라이나는 고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서방 경제제재의 칼날은 무뎌졌고, 통념과 달리 러시아를 떠난 서방 기업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민간인 사망자만 1만명이 넘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황에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다.
우크라이나 키이우경제대학이 집계하는 데이터베이스는 러시아에 투자한 해외 기업을 △사업 유지 △신규 투자 유보, 사업 축소 △사업 중단, 철수 △철수 완료의 네가지 유형으로 나눠 재편 현황을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올해 10월1일 기준 3533개 해외 기업 중 사업 유지가 41.5%로 가장 많았고 철수 완료는 8.1%로 미미하다. 왜일까? 직접적인 제재 대상이 아니라면 막대한 투자 비용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어 자발적으로 사업을 이어가거나, 러시아 정부의 다양한 기업 철수 억제 조치로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부진한 사업을 유지 중인 기업도 늘었기 때문이다. 칼스버그와 다논처럼 러시아 당국에 사업을 압류당한 사례도 있다. 이 전쟁 피해자에는 민간인뿐 아니라 민간 기업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탐대실한 기업도 있다. 네덜란드 주류 기업 하이네켄은 전쟁 발발 직후 일찌감치 탈러시아를 선언했으나 경쟁사가 먼저 사라지자 발빠르게 새로운 브랜드까지 출시하며 반사이익을 누렸다. 하지만 반러시아 운동단체들의 철수 압박에 못 이겨 고작 1유로에 전 자산을 현지 기업에 매각하고 서둘러 나왔다. 하이네켄은 지금도 러시아 정부의 철수 억제 조치와 1800명 고용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못 나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진실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러시아가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방산과 에너지 업종에서도 서방 기업들은 가급적 버티기에 나섰다. 해외 기업의 업종별 대러 사업 재편 실태를 보면, 사업 유지 비중이 가장 높은 업종은 방산(87%)이다. 남은 기업들 명단에는 중국, 이란뿐 아니라 놀랍게도 미국, 독일, 프랑스 등 대러 경제제재에 앞장서는 주요 7개국(G7) 기업들도 보인다. 에너지 업종에서도 영국과 캐나다를 뺀 나머지 주요 7개국 기업들이 잔류한 게 눈에 띈다. 미국과 프랑스 등 원전 가동국이 러시아 국영기업 로사톰에 고순도 저농축 우라늄 조달을 온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도 확인하게 된다.
러시아의 해외 기업 재편 실태를 나라별로 보면, 안보 위협이 최고조에 이른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러시아 인접국은 사업 중단 및 철수 완료 비중이 매우 높다. 반면 해외 기업 중 최다 비중을 점하는 미국(21.2%)과 독일(11.3%)의 철수 완료 비중은 각각 7.6%, 8.5%로 최저 수준이다. 사업 유지 비중이 높다고 반대 진영이라고 속단하기도 어렵다. 아랍에미리트(89%), 튀르키예(87%), 중국(84%), 인도(83%) 등 비서방뿐 아니라, 한국(79%), 이탈리아(63%), 독일(55%) 등의 사업 유지 비중도 미국(23%)의 두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은 지난 9월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이 러시아로부터의 이민이나 송금, 대러 우회수출, 러시아를 대체하는 투자·관광 등 대러 경제제재의 반사이익에 힘입어 2023년(5.7%)과 2024년(5.9%)에 고성장을 시현할 것으로 내다봤다. 러시아도 2023년 1.5% 성장을 점쳤다. 실제 유럽연합(EU)산 반도체를 탑재한 가전제품은 물론 첨단 전자부품과 드론이 중국, 이란, 카자흐스탄, 튀르키예, 아랍에미리트 등 경제제재 불참국을 우회해 러시아로 유입되고 있다. 상호의존성이 고도화된 오늘날 서방 일부의 대러 제재는 애초부터 무용론이 제기된 터에, 서방은 서로 어긋난 대러 제재 명단을 조율하려는 움직임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 우리 눈앞의 상황은 여전히 상호의존성이 강고한 나라들이 군사안보 면에서는 ‘신냉전’적 질서를 강화하고 가치와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경제적인 실리는 챙기는 냉혹한 ‘보호주의 진영화’ 현실을 웅변한다. 모든 나라의 생산과 고용, 자국민의 안위가 걸린 실존적 문제다. 내일 어디에서 또 어떤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가 이를 탓하겠는가. 가치와 실리의 균형추를 맞추는 유능한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긴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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