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에 밥해 준 죄로 엄마는…이름 싣지 말라, 아직도 두렵다”

김봉규 2023. 10. 1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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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제노사이드의 기억 충남 아산_수복지 부녀자들의 비극
엄마로 보이는 성인 뼈와 포개져 발견된 어린아이 갈비뼈 부근에서 파란 구슬이 발굴되었다. 이를 촬영하는데 사진기 뷰파인더에 가득 찬 구슬이 흡사 지구와 같아 파란 부분은 바다, 흰 부분은 구름으로 보이는 환영에 사로잡혔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이어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지구촌에서 전쟁과 학살은 언제쯤 멈추게 될까 암울하기만 하다. 김봉규 선임기자
박씨는 “시골 사람들이 뭘 알았겠냐. 정치이념을 모르는 우리 부모님은 단지 북한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며 “내 이름은 절대 지면에 싣지 말아 달라. 아직도 빨갱이 자식이라는 시선이 나를 향할까 두렵다고”고 말했다. 박씨도 학살터에서 발굴된 유해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 이승만 정부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한강대교를 폭파하고 좌익 의심자로 예비검속된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했다. 그리고 9·28 서울수복 뒤 올라오면서 부역 혐의자들을 재판이나 뚜렷한 기준 없이 또다시 학살했다. 북한군이 잠시라도 점령했던 지역에서는 부역자 색출과 심사·분류작업이 시작되면서 상호 의심과 밀고가 창궐했다. 서울의 경우는 한강대교가 폭파되기 전 재빨리 한강을 건너 피난 간 도강파와 어쩔 수 없이 남게 된 잔류파로 나뉘게 되는데, 되돌아온 도강파는 애국자가, 잔류파들을 부역 혐의자가 되었다.

부역자라고 하지만 상당수는 북한군 총부리에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1990년 ‘역사비평’ 여름호에 박원순 변호사는 ‘전쟁부역자 5만여명 어떻게 처리되었나’에서 ‘한국전쟁 당시 실제 적극적으로 나서서 인민공화국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은 이미 북으로 가 버린 터였다’라고 말하는데, 설득력 있게 들린다. 1950년 11월13일 군·검·경 합동 수사본부가 발표한 전국의 검거된 총부역자 수는 4만8945명, 당국에 의해 인지된 총부역자 수는 55만915명으로 집계했다. 부역 혐의자로 검거된 사람들 가운데 부녀자가 꽤 있었는데, 그들의 일부 죄목은 된장, 고추장 혹은 놋그릇 등을 수집하여 인민군에게 제공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부역 혐의자들과 그 가족 200여명이 집단 총살된 학살터 현장을 찾았었다. 지난 2018년 2월 충남 아산시 배방읍 수철리 산 174-1번지 설화산(해발 447.5m) 8부 능선 부근의 폐금광에서의 유해발굴 때였다.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아래 경찰과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학살에 나섰던 현장이다. 마을 민가에서 20여분 조금은 가파르게 오르니 발굴현장이 나왔다. 이른 아침엔 땅이 얼어 삽으로 흙을 파내기 힘겨웠고, 오후엔 언 땅이 녹아 질퍽거렸다. 박선주 유해발굴 단장(충북대 명예교수)은 “부녀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비녀 49개와 가족으로 보이는 성인 남자 유해와 어린아이들은 엄마로 추정되는 여성 유해 옆에서 함께 발굴되었다”라며 현장의 상황을 전했다. 특히 이곳에서는 어린아이들의 뼈와 함께 성인 남성보다 여성의 유해가 더 많이 발굴되었다.

유해발굴 소식을 듣고 67년 만에 처음으로 학살터를 찾은 박주순(82) 할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장소를 알고는 있었지만 무섭기도 했고, 연좌제 때문에 엄두가 나질 않아서 이제야 찾았다”며 “아버지, 작은아버지와 고모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 가족 모두 이유도 모르고 이곳 학살터에 끌려오다가 엄마와 동생들하고 대열에서 기적적으로 도망쳐 동네 화장실에서 숨어있는데 조금 있다가 굉음의 총소리가 계속 났다”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 할머니는 “아버지 미안해요. 이제야 아버지가 죽은 장소를 찾아왔네요. 용서하세요. 아버지”라고 눈물을 훔쳤다.

 박아무개(75세)씨는 “바로 위 누님이 최근 돌아가시기 전 ‘외부 사람은 물론 아이들 며느리까지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세상이 또 바뀌면 우리도 아이들도 죽을 수 있다”라며 눈을 감았다고 했다. 박씨는 “시골 사람들이 뭘 알았겠냐. 정치이념을 모르는 우리 부모님은 단지 북한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며 “내 이름은 절대 지면에 싣지 말아 달라. 아직도 빨갱이 자식이라는 시선이 나를 향할까 두렵다고”고 말했다. 박씨도 학살터에서 발굴된 유해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작은 유품들을 가까이 대고 찍기 위해 사진기를 고정할 수 있는 복사대와 함께 마이크로(접사)렌즈를 미리 준비했다. 한 주검 약지 손가락뼈에 끼워져 있는 쌍가락지를 보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반지를 끼워줬을 남편도 이곳에서 함께 죽었을까? 아이와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픈 희망이 총부리에 쓰러졌을 것을 생각하니 사진기 셔터를 누르려던 손가락 힘이 풀렸다. 엄마로 보이는 성인 뼈와 포개져 발견된 7살 정도의 어린아이 갈비뼈 부근에서 파란 구슬이 발굴되었다. 구슬을 마이크로(접사)렌즈로 가까이 바라보았는데, 지구처럼 보였다. 구슬의 파랑은 바다, 흰 것은 구름으로 보이는 환영에 사로잡혔다. 아이는 곧 닥칠 죽음이 뭔지는 몰랐어도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가지고 있던 구슬을 고사리손으로 꼭 쥔 채 가슴팍에 모으고 있지 않았을까. 총소리와 함께 자지러지는 아이들의 비명이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김봉규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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