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경이 먼저 띄운 '험지 출마론'…스스로냐? 떠밀려서냐? [와이즈픽]
총선의 '상수' 험지 출마론…'바보 노무현'이 만들어진 계기
험지(險地). 사전적 의미는 험난한 땅. 총선에선 당선되기 힘든 출마지를 말한다. 다들 꺼린다. 국회의원들이 목을 매는 당선과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론 희생이고 큰 도전이다. 출마 자체로 큰 의미를 갖기도 한다. 시야를 넓고 길게 가질 때 가능한 얘기다. 이른바 큰 정치를 꿈꾼다면 험지 출마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험지 출마하면 떠오르는 정치인이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지하는 사람과 지지하지 않는 사람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는 1998년 재보궐선거로 당선된 서울 종로구를 떠나 부산 북·강서을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낙선했다.
정치 1번지이자 당선 가능성이 컸던 종로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던 명분은 한국 정치의 고질적 문제인 지역주의 타파였다. 이때 '바보 노무현'이란 별칭이 붙기 시작했고 대통령 당선의 밑거름이 되었다. 스스로 선택한 험지 출마가 한 정치인에게 좋은 결과를 만든 예로 꼽힌다.
21대 총선 때 황교안 대표를 괴롭혔던 '험지 출마론'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도 험지란 말이 화두로 떠올랐다.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에게 유독 험지 출마 요구가 많았다. 그는 총선을 앞두고 같은 해 1월 장외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도권의 험지로 나가서 여러분과 함께 싸워 이기겠습니다. 중진분들께서도 함께 험한 길로 나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결과적으론 그의 말대로 따라오지 않았다.
황교안 전 대표는 뜸을 너무 들였다. 도대체 그가 말한 '수도권 험지'가 어디인지를 두고 설만 무성한 채 오랜 시간이 지났다. 대부분의 언론은 서울 종로라고 추정했지만 그는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시 진영 의원의 탈당으로 민주당에 넘어간 용산인지, '문재인의 남자'로 불린 윤건영 전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이 출마하는 구로을인지, 아니면 민주당에 빼앗겼던 강남을, 이도 아니면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 비판의 상징인 양천구인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모두 험지가 아니었던 게 더 큰 문제였다.
결국 그가 선택한 곳은 정치 1번지 종로였다. 이를 험지로 포장했고 여기서 문재인 정부 실정을 심판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마저도 이낙연 전 총리가 출마 선언을 먼저 하는 바람에 정치적 타이밍 선점에서 밀리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결국 그는 낙선했고 총선 전 초반에 불붙던 험지 얘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험지 출마론이 좋지 않은 결과로 남게 된 경우다.
이번엔 국민의힘에서 먼저 나왔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는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험지 출마의 테이프를 끊었다. 8월에만 해도 '할 일이 남아서 부산 해운대에 남겠다'고 밝혔지만 두 달 만에 험지 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하 의원은 2012년, 2016년, 2020년을 비롯해 세 번의 총선에서 내리 당선된 부산 해운대구의 터줏대감이다. 부산의 강남으로 불리는 해운대구는 국민의힘 지지세가 강한 지역, 시쳇말로 표밭이 괜찮은 곳이다. 그는 친윤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을 노리는 친윤 인사들이 많다. 경선한다면 경쟁력이 있지만 경선 기회가 아예 주어지지 않는 최악의 경우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하태경 의원이 험지 출마를 선언하면서 처음엔 서울로 못 박았다. 그런데 조금 달라졌다. 1순위는 서울이지만 경기도도 배제하는 것은 아니고 순위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이렇다고 그가 띄운 험지 출마 의미가 퇴색하진 않는다. 수도권 출마로 하고 선택지를 계속 넓혀간다면 그의 정치력은 총선 전까지 유지될 수 있다.
적어도 국민의힘 안에서 그의 말에 힘이 생기기 시작한다. 다른 중진들은 그의 눈치를 보게 된다. 당선된다면 물론 그는 정치인으로서 한 단계 상승한다. 실패하더라도 나중에 부산시장 공천 때 이름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 낙선이 곧 정치적 실패는 아니라는 의미다.
내년 총선 때도 '험지 출마' 이슈…누가 먼저 공천 혁신?
내년 22대 총선을 앞두고도 험지 출마론은 분명 핵심 이슈로 떠오를 것이다. 이전 총선 때도 그랬듯 어느 당이 먼저 공천 혁신을 하느냐에 따라 성적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의 경우 최대 30명대에서 적어도 20명 정도일 것으로 관측되는 '용산 차출설'과 맞물려 있다. 이들 대부분이 영남권이나 서울 강남 등 당선 가능성이 큰 지역으로 갈 것으로 보이는 만큼 해당 지역 현역 의원들에게 험지 출마 압력이 가해질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21대 총선에서 절대적 과반 의석을 차지한 만큼 수도권 중진들에게 험지 출마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 특히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 이후 촉발된 가결파 색출 논란과 연결되어 있다. 물론 친명계 중진들도 안심할 수 없다. 자신은 빼고 상대에게만 변화를 강요할 순 없기 때문이다.
험지 출마라고 해서 영남에 지역구를 둔 의원이 갑자기 호남으로 가거나, 호남 기반 정치인이 영남으로 가는 걸 말하진 않는다. 이건 험지가 아니라 이른바 사지(死地)다. 국민의힘 영남 의원들에게 내년 총선의 대표적 험지는 수도권일 것이고, 민주당 수도권 의원들에게 험지는 영남이나 서울 서초·강남일 것이다. 3선 이상이면 당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출마 요구가 나올 것이고 선택할지 말지는 철저히 본인의 몫이다.
분명한 건 떠밀려 나가는 험지 출마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고, 스스로 선택한 험지 출마는 나중에라도 정치적 성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그랬다.
YTN 이대건 (dglee@ytn.co.kr)
YTN 배인수 (insu@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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