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독립운동가 부부가 딸에게 영어 이름 제시를 지어준 이유는
'제시의 일기'
지금 대학로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제목입니다. 처음엔 '제시'라는 이름 때문에 외국이 배경이고 외국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시'는 한국인이었습니다. 제시는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양우조(1897-1964), 최선화(1911-2003) 부부의 딸 '양제시'를 가리킵니다.
'제시의 일기'는 양우조와 최선화가 중국에서 제시를 낳고 8년간 함께 쓴 일기입니다. 1938년 7월 4일부터 1946년 5월 4일까지 쓰인 이 일기는 제시를 키우는 이야기를 담은 '육아일기'입니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일전쟁의 와중에 일본의 공습을 피해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으로 이동해 간 과정을 기록한 사료이기도 합니다. 임시정부가 일본의 패망 소식을 알았던 때가 1945년 8월 10일 저녁 8시였다는 사실도 이 일기를 통해 확인됐습니다.
제시의 일기는 양우조 생전에는 묻혀 있었다가 1999년에야 외손녀 김현주(제시의 딸)가 정리해 1999년 한 출판사에서 발간됐습니다. 하지만 이 회사가 없어지면서 절판됐다가 2019년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우리나비 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됐습니다.
양우조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그 시대 지식인이었습니다. 미국에서 19살의 나이에 초등학교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 대학까지 마쳤습니다. 동포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싶다는 일념으로 방직 공학을 전공했지만, 귀국 후 일제의 방해로 고향에 방직공장을 세우려는 꿈을 접고 다시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합니다. 임시정부 선전 위원, 광복군 총사령부 참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습니다.
최선화 역시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던 신여성이었습니다. 최선화는 선배의 소개로 양우조를 서울에서 처음 만났고,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에 간 후에도 편지로 교류를 계속하다 결혼을 결심하고 1936년 중국으로 찾아갑니다. 양우조는 당시 중국인 이춘삼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결혼하면 위험이 기다린다는 걸 알면서도 최선화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최선화는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활동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로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1938년 7월 4일, 중국 호남성 장사
아기의 이름은 '제시'라고 지었다. 집안의 돌림자가 '제' 자인데 '제시'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영어 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기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제 몫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아기 또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 있는 한국인으로 활약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지었다. 세상에 나온 걸 축하한다. 우리 제시!" (p.34)
국제화 시대인 요즘이야 외국인에게도 발음이 어렵지 않은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지만, 저 시절에 벌써 저런 생각을 했다니. 나라를 빼앗겨 해외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밝은 한국의 미래와 딸의 미래를 그려보며 '제시'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독립운동가 아빠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1939년 2월 8일, 유주
일기가 맑기만 하면 왜놈의 비행기가 폭격하러 내려오는 것이 일과다. 하지만 제시는 야외로 나가기만 하면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한참씩 늘어지게 자는 것이다. 포탄 속에 납작 엎드려 있는 사람들 속에서 새근새근 자는 걸 보니 참 속도 좋은 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마치 거울이 되는 것과 같다. 자식들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부모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거울이 깨지면 그 속에 비춰진 모습도 흉하게 일그러진다. 아이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에 대해 눈뜨게 된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현재의 모습을 확인하고 미래를 그려 본다. 이제 나는 한 아이의 거울이 되어 그 아이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또 깨닫게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p.64)
큰딸 제시에 이어 둘째 딸 제니도 태어납니다. 일기는 아이들 이야기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의 고단한 일상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기록했습니다. '큰 일'을 하는 독립운동가들도 집에서는 다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구나, 싶은 대목들이 많습니다.
"1943년 3월 22일. 사천성 중경
제시 엄마의 말에 의하면 오늘이 기념할 날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이다. 저녁 식사 후, 저 멀리로 산보를 몇 시간 하고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어린애들은 오랜만에 나가 다니매 좋다고 한다. 어떻게 가 버렸는지 모르게 가 버린 인생의 푸르른 시간들이다. 심한 역경 속에서도 천진하게 자라고 있는 이 어린애들이 어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p.213)
'제시 엄마의 말에 의하면'이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제시 아빠는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제시 엄마의 말을 듣고서야 기억해 냈나 봅니다. 행간에 멋쩍어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무슨 이벤트를 할 여유도 없는 상황이라 가족들은 그저 결혼기념일 기념 '산보'를 다녀왔을 뿐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이런 시간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을 겁니다.
"1939년 1월 25일, 유주
요즘의 임정은 한국 국민당과 재건한국독립당, 그리고 조선혁명당 등 임시정부 주변의 민족 진영이 뿔뿔이 갈라져 있고,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 등 임시 정부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는 있지만, 진전이 뚜렷하지 않다.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처럼 그렇게 움직임이 발전되면 좋으련만." (p.63)
"1939년 4월 19일, 유주
제시는 아침부터 비 내리는 것을 구경하자며 문 밖으로 나가자고 야단이다. 떼를 쓰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치지를 않는다. 그쳤다 내렸다 하는 요즘의 비처럼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게 바로 우리 앞의 정황이다." (p.71)
"1945년 8월 13일, 사천성 중경
우리나라에 탁치 제도를 쓰기로 벌써 결정이 되었다는 말도 들리고 있다. 아, 이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우리 전 민족, 더구나 해외에서 독립운동 하러 다니던 이들의 목적과는 너무도 심한 차가 있는 것이다." (p.246)
지금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제시의 일기'는 '독립 운동가도 아이 키우느라 쩔쩔매는 보통 사람이었다'는 콘셉트로 유쾌하게 진행됩니다. 공연이 시작되면 어른이 된 제시가 일기장을 들고 등장했다가 일기 속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엄마 아빠의 젊은 시절을 함께 합니다. 시대적 아픔이나 독립운동가의 고뇌가 그리 드러나지 않는 점은 좀 아쉬웠는데, 젊은 관객들이 주 대상이고 규모가 작은 소극장 뮤지컬이다 보니, 좌충우돌 육아에 초점을 맞춰 발랄하게 풀어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런 소재로 창작 뮤지컬이 만들어지고 젊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웠습니다. (▶뮤지컬 넘버 보기 "제시 캔 두 잇")
[ https://www.youtube.com/watch?v=JtO-xotrFFU&t=7s ]
'제시의 일기'의 주인공인 제시는 세상을 떠났지만, 제니(제경)는 생존해 있습니다. 양제경은 뮤지컬 '제시의 일기'를 보고 '오늘은 아빠, 엄마, 언니를 모두 만난 기쁜 날'이라며 감격했다고 하죠. 뮤지컬 '제시의 일기' 주최 측은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 100팀을 공연에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훗날 이국을 떠돌며 생활했던 이유를 묻는다면 '너의 미래를 위해서였다'라는 짧은 한 마디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p.62)
이렇게 고뇌하는 독립운동가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시가 언젠가 인생의 좌절에 부딪힐 때 우리에게 제시가 지녔던 소중한 의미를 기억해 냈으면 좋겠다'(p.89)라고 쓴 마음도요. '제시의 일기'를 딸에게도 권해 봐야겠습니다.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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