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활개 사회에서 걷고 사색하며 쓰다···강화도 만행 끝에 나온 박호성의 인간론
박호성은 신간 <인간론>(범우사) ‘말문을 열며’에 “혼자 걷고, 혼자 밥해 먹고, 혼자 응시하며 이 책을 썼다”고 적었다. “유일하게 잘하는 게 걷는 것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에 의존할 필요도, 시간에 얽매일 필요도 없지요. 원하는 걸 주체적으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걷기입니다.”
지난 13일 강화도에서 만난 그는 ‘단독과 주체의 공간’ 중 하나로 안내했다. 인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굴암돈대다. 해안선 따라 난 굴암돈대 위로는 건평항, 아래는 후포항이다. 맞은 편이 석모도다. “조선 숙종 5년(1679)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재임해 있을 때, 병조판서 김석주의 명을 받아 쌓아놓은 것”이란 설명을 적은 안내판 앞에서 박호성이 말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1시간가량 머무는 동안 아무도 찾지 않았다. “무슨 주제나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책상에 앉아선 해결이 안 돼요.” 산책은 ‘학문을 위한 길’이다. “하나의 연구 대상에 철저하게 집중”하는 방법론이다. 늘 수첩을 가지고 다닌다. 걷다가 생각이 떠오르고, 말머리가 풀리면 수첩에 적었다가 집에 돌아간 뒤 컴퓨터에 옮긴다.
산책은 “‘사색’은 사라지고 ‘검색’만 활개”치는 한국 온라인 문화에 대한 저항의 행위이기도 하다.
독일 서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숲과 호수 산책을 즐겼다. 서강대 부임(정치외교학과)하고도 뒷산인 노고산을 자주 올라갔다. 정년 퇴임 이듬해인 2015년 내가면 고천리로 왔다. 강화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고려지(高麗池) 옆에 작은 이층집 하나를 구했다. ‘산책 중독자’라는 놀림까지 받을 정도로 걸어다녔다. “청정한 공기와 정밀한 정적”에 스며들 듯 다녔다. 산책은 만행(萬行)이자 탐험이었다고 말한다. 산책 묘미와 철학도 발견했다. 책엔 이렇게 적었다.
“매일 매일이 섬뜩하나 휘황한 여행길이 되곤 했다. 세상에 태어나 난생 처음 걸어보는 길도 무수히 많이 발굴하였다. 개척자답게 ‘고생을 사서 하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낯설고 위태로운 길이 오히려 더 좋았다. 물론 부지기수로 길을 잃어 헤매기 일쑤였다. 늘 회의와 의혹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종내에는 옳은 길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마지막 힘을 다하면, 결국엔 옳은 길이 반드시 나타났다. 실은 모든 길이 서로 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은 다만 만드는 것일 뿐, 이 세상에 본래부터 만들어진 길은 하나도 없다. 환희의 연속이었다. 회의에서 출발해 환희로 마감하는 것, 실은 이게 산보의 진미였던 것이다.”
그 “옳은 길”은 한길이었다. 설립부터 지금까지 참여연대, 학술단체협의회 일을 한다. 정치권 인사와 접촉 빈도가 높은 ‘정치외교학과 교수’였다. 그와 친했던 여러 사람이 정치권으로 갔다. 기관장이나 국회의원이 된 이도 여럿이다. 그는 다른 길로 새지 않았다.
“바를 정(正)은 한 일(一) 자와 멈출 지(止)로 만들어진 글자죠. 하나에 멈추는 것이 올바른 겁니다. 교수했다가 정치했다가, 또 이것저것 했다가…. 올바른 사람이 아니죠.” 그는 “하나 딱 믿어줘요. 변함없이 한 길을 걸을 사람이라는 거를요”라고 했다.
교수나 교수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다. 책엔 교수들을 두고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비일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그리고 개성적인 것을 몰상식한 것으로 오독하거나, 자기에게만 손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천리마로 하여금 기꺼이 짐 마차를 끌게 하고도 남을 사람들 아닌가…?” 하는 나무람과 “그들은 의로움이 아니라 이로움만 찾아 나서는 자들”이란 세간의 꾸지람을 옮겨 적었다.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1405302051435
박호성은 2014년 펴낸 <지식인>(글항아리)에 불의에 항거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표상이 된 교수 F가 실은 ‘랑데부 살롱’ 단골이자, 자기 부동산 소유지 판자촌이 빨리 철거돼 개발되길 염원하는 인물임을 폭로하는 내용의 단편 소설도 실었다. 지금 보면, ‘내로남불 지식인’형을 예견한 소설인 셈이다.
박호성의 산책론은 <인간론> 집필 과정에 관한 말이기도 하다. 책은 10여 년 만행과 사색의 결과물이다. <평등론>, <휴머니즘론>, <공동체론>과 생태론 연구서 <자연의 인간, 인간의 자연>을 한데 담은 책이다.
왜 ‘인간’일까. 박호성은 “정치철학의 본질은 인간 문제”라고 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철학은 자연철학 즉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엔 관한 내용으로 이뤄졌지요. 자연철학 문제를 인간 문제로 돌린 게 소크라테스입니다. 철학사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의미 있는 일입니다. 정치 철학, 정치사상의 핵심 소명 대상이 바로 인간 문제인 겁니다.”
책에서 인간 본성, 인간과 자연의 관계, 공동체, 르네상스와 휴머니즘, 인연 휴머니즘 등을 다룬다. 동서양 철학과 정치학, 종교학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든다. ‘인간적인 인간을 위하여’라는 부제를 붙인 책에서 돋보인 건 성찰과 반성의 회고로 ‘인간’을 파고드는 대목이다.
언니는 이 나라로, 동생은 저 나라로 보내버리기도 한,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해외 입양 문제를 두고 “한국인들은 과연 인도적인가”를 묻는다. 박호성은 이 고발의 글에서 1970년대 중반 독일 유학을 떠날 무렵 비행기 삯 말고는 한 달가량 버틸 돈밖에 없어 수소문 끝에 홀트를 찾은 일을 적었다. 당시 홀트는 입양아를 유럽 양부모에게 데려다주는 이에게 항공료 반값에 해당하는 돈을 줬다. 아이 셋을 맡은 박호성은 기내에서 우유병을 물려주며 독일로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들과 어른 항공료를 모두 양부모 측이 부담했다. 그러고도 홀트 측은 ‘헌금’과 ‘자선’ 같은 일로 이 ‘수송’을 포장했다. 박호성은 이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기억을 다시 불러내 적었다. 박호성은 ‘아이 수출’ 문제에서 한국인들의 해외 현지 노동자 착취와 인권 문제로 짚으며 다시 한국인은 인도적인가를 묻는다.
책은 한국 사회 비평서이기도 하다. OECD 국가 중 비정규직 노동자가 가장 많고,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으며, 합계출생률이 세계 최하위, 자살률도 최악인 현실을 거론하며 인간론을 이어간다. “자유롭게 억눌리는” 남한과 “평등하게 굶주리는” 북한 등 한반도에 관한 글도 담았다.
이 ‘학술서’는 쉽다. 경험담을 입말로 풀어낸다. 시도 인용한다. “한겨레 창간 직후 논설위원도 지냈어요. 쉽게 쓰는 문화를 신문사에서 접한 거죠. 고등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도록 쓰는 훈련을 많이 받았어요. 학자들도 어렵게 쓰는 거 질색이거든요. 대학원생들도 현학적인 티 낸다고 어렵게 쓰는 말들이 있거든요. 딱 질색이야.”
강화로 온 지 10년이다. “강화도에서 아예 ‘종신 자유 귀양살이’의 길로 들어서기로 작심했죠. 인생행로의 마지막 정착지로 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친구들은 이 ‘유별난 생활’을 두고 “꼴값한다”고 타박한다고 했다. “지금도 아내가 해주는 밥 먹고, 골프 치러 다니는 그들 눈으로 보면 내가 기괴한 거죠.” 그는 “고독해도 외롭지는 않다”고 말했다.
책에선 인간 본성을 ‘고독’과 ‘욕망’이라 규정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서 고독한 인간이 “서로 돕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아끼고, 더불어 손잡아 버텨나가는 것이 그래도 현명한 처사 아닐까. 이를테면 서로 연대하며 공존·공생해야 할 자연적 소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오게 된 숙명적인 삶의 동반자”라며 인간론을 이어간다. 그는 연대를 “고통을 나누어짐으로써 함께 살아남을 힘으로 적용하는 것”이자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는 조화와 화합의 삶을 가꾸어나가기 위해 극진한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자발적인 정신적 결의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
“자신의 항문에서는 썩은 냄새를 쏟아내면서도, 코로는 향기만을 맡으려 안달”하는 게 인간이지만 연대 또한 인간본성이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연대를 외면하는 일은 곧 자연의 순리에 등 돌리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했다
박호성은 ‘고독’과 ‘욕망’이라는 본성에서 나오는 ‘공포심’과 ‘이해관계’가 ‘인연’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맺은 점에 주목한다.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게 ‘사회적 인연(因緣)’이다. 그는 공포심과 이해관계, 즉 ‘인(因)이 결국 주어진 자연환경 속에서 인간을 서로 결집토록 해 공동체를 구성토록 이끄는 자연적 추동력, 즉 ‘연(緣)’과 결합하면서 사회적 인연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사회적 인연론은 근본적으로 ‘관계 맺음’을 존중하는 이해방식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타 개인 및 집단에 대한 ‘배려’를 필수적인 덕목으로 인지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특성을 지니게 된다”고 했다.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심적 관용에 심적 관용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마음가짐”이다.
박호성은 이러한 인연을 모든 인간관계의 단초로 여긴다. 인류사를 인연의 역사로 간주한다. 책에서 인연사관이란 새로운 역사관을 내놓기도 했다. “너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너가 존엄하기 때문에 나도 존엄하다”는 취지의 인연사관은 생태환경과도 이어진다.
박호성은 ‘건강 마니아’다. 1995년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그 뒤로 삶과 죽음의 철학적 문제와 함께 ‘몸과 건강’이라는 신체적 문제도 함께 궁구했다. 책에서도 먹고, 마시고, 싸고, 숨 쉬고, 열 내고, 빛을 받는 몸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일을 전체 생명체와 생존 문제와 연결한다.
박호성은 인터뷰 중간중간 온갖 건강 정보를 알려줬다. 100% 발효 식초 물 먹기, 칫솔질 전후 천일염 물로 입안 헹구기, 혓바닥으로 입천장 굴리기, 오른손잡이는 왼손 쓰기, 목표 지점을 정한 뒤 눈 감고 걷기 같은 내용이다. 숟가락으로 발바닥을 긁는 일종의 발바닥 지압법 담은 영상도 인스턴트 메시지로 보냈다. “혼자라도 건강하게 잘 먹고 잘살아가려고 터득한, 혼자살이·건강살이 지혜”라며 웃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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