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재발 막겠다더니…영진위, 예산 7000만원 ‘불용 처리’ 계획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벌어진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해 편성된 예산을 70%가량 불용 처리할 예정인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달에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를 위해 꾸려진 특별위원회 민간위원들이 피해 인정에 소극적인 영진위를 비판하며 일괄 사퇴하는 일도 벌어졌다. 영진위가 블랙리스트 사건 후속 조치에 사실상 손을 놓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7일 임종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영진위로부터 제출받은 ‘블랙리스트 재발방지 및 제도개선을 위한 연구사업 예산 집행 내역’을 보면, 영진위는 올해 블랙리스트 후속 조치 명목으로 편성된 예산 1억원 가운데 2955만원(29.5%)만 집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진위는 피해자 구술 채록 연구 등 기록사업에 쓰려고 했던 나머지 7000여만원은 모두 불용 처리할 것으로 파악됐다.
영진위가 이미 집행했거나 올해 안에 쓸 계획이 있다고 밝힌 예산에는 특위 위원들에 대한 수당 등 운영 비용 1783만원, 블랙리스트 피해자 상담비용 64만원, 재발방지 교육 비용 1000만원 등이 포함됐다. 당초 영진위는 피해 재발을 막기 위해 구술채록 연구(4000만원), 특위 공청회(1000만원), 블랙리스트 관련 책자·백서 발간(2000만원) 등 기록사업도 할 예정이었으나 이 사업들은 모두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영진위 측은 블랙리스트 관련 사업을 위한 특위가 사실상 해체돼 사업 추진이 어렵게 됐다는 입장이다. 영진위 관계자는 이날 통화에서 “지난달 특위 민간위원들이 전원 사퇴하면서 특위와 협의해서 진행하기로 했던 일부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게 됐다”면서 “불용 처리하는 예산은 내년도 영화발전기금으로 편입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블랙리스트 특위 위원 11명 중 민간위원 9명은 지난달 26일 블랙리스트 후속조치와 관련한 영진위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하며 사퇴했다. 앞서 민간위원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영진위에서 사업배제 및 검열을 당한 94건을 포함해 총 2891건을 ‘피해’로 확인하고 이를 인정하는 방안을 논의·의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영진위는 지난 6월 안건 상정을 부결시켰고 특위 위원들과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민간위원으로 특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은 “영진위가 그렇게 민간위원들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사퇴를 만류해야 했다”면서 “블랙리스트 사후 조치에 대해 아무 의지도 보이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민간위원 핑계를 대고 있다”고 말했다. 원 관장은 “애초 영진위는 지난해 특위 임기 1년 연장을 반대했을 정도로 이 문제에 진정성이 없었다”고 했다.
임종성 의원은 “특위가 해체됐더라도 구술 채록 연구나 백서 발간 등의 기록 사업은 영진위 내부적으로도 얼마든지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라며 “영진위가 영화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에 의지는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영진위가 블랙리스트 피해 인정과 더불어 진상규명, 피해자 명예 회복을 위한 후속 조치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했다.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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