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인천상륙작전 기념에 발끈한 이유[김상운의 빽투더퓨처]

김상운 기자 2023. 10. 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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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인천·노르망디 상륙작전 비교 분석

최근 한중 정부 관계자들이 ‘인천상륙작전’을 두고 자극적인 설전을 벌였습니다. 지난달 15일 인천상륙작전 73주년을 맞아 한국, 미국, 캐나다 해군이 함정 20여 척, 항공기 10여 대를 동원해 전승 기념행사를 열자, 중국 국방부 대변인이 “미국이 동맹국들을 모아 중국의 문 앞에서 도발적인 군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좌시하지 않겠다”고 도발한 겁니다. 이에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상대 국가에 대해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며 맞받았죠.

이른바 ‘전랑 외교’를 펼치며 주변국에 막말을 서슴지 않는 중국인지라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인천상륙작전 행사에 유독 발끈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세계사에서 역대 최대 상륙작전으로 꼽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견되는 인천상륙작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해답의 단초가 보입니다. 자, 그럼 시계를 1940, 50년대로 돌려볼까요.

인천상륙작전 직후 돌변한 마오쩌둥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사다리를 타고 해안에 발을 내딛는 미 해병대원들. 가장 선두에 선 이는 로페즈 중위로 이날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수류탄을 끌어안고 전사했다. 동아일보DB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 33분 미 제5해병 연대 제3대대의 월미도 기습으로 막이 오른 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게임 체인저’였습니다. 그 전까지 유엔군은 북한군의 속도전에 밀려 전쟁 발발 한 달여 만에 수도를 빼앗긴 채 낙동강까지 후퇴한 상태였죠. 낙동강전선 사수를 위해 유엔군이 버티기에 돌입한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배후를 때리면서 수도권과 낙동강전선 양쪽에서 협공을 가하는 형국으로 전세가 확 바뀝니다. 특히 한미 해병대가 상륙 닷새 만에 한강 도하 준비에 들어가는 등 순식간에 수도를 탈환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전황을 뒤집으려면 수도를 점령해야한다는 맥아더의 구상이 현실화된 거죠.

재미있는 건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의 태도가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돌변한 사실입니다(이하 김동길 등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역사학보, 2015년) 참고)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승전을 거듭하던 1950년 7, 8월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은 중국군의 조기 파병 의사를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전합니다. 하지만 동유럽에서 미국의 개입을 막고 아시아에서 전쟁의 수렁에 빠져있기를 원한 스탈린이 이에 부정적으로 반응하죠.

그런데 막상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한군이 수세에 몰리자, 마오쩌둥은 온갖 핑계를 대며 파병 불가 의사를 밝힙니다. 심지어 유엔군의 38선 돌파가 임박한 10월 1일 스탈린과 김일성의 다급한 파병 요청에도 그는 3차 세계대전 가능성과 국내의 부정적 여론 등을 이유로 파병 불가를 통보하죠. 그러나 이후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마음을 돌려 10월 13일 참전을 결정하고 18개 사단 20만여 명의 중국군을 투입합니다.

상륙작전의 군사적 의미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5일 인천 팔미도 근해에 정박한 노적봉함에서 열린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사실 바다를 건너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상륙작전은 예측 불가의 바다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작전에 속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대륙을 제패한 히틀러가 영국을 끝내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나, 대서양과 태평양에 둘러싸인 미국이 9.11 테러를 제외하곤 개국 이래 본토 공격을 당한 전례가 없다는 것, 13세기 몽골의 동아시아 침공에서 일본 열도가 살아남은 것도 모두 ‘바다’라는 천혜의 장벽이 가로 막고 있었기에 가능했죠.

그만큼 바다는 공격자 입장에서 전력을 투사하는데 최대의 장애물이 됩니다. 이것이 저명 국제정치학자이자 군사전략가인 존 미어셰이머가 “세계의 대부분이 바다로 덮여 있다는 사실은 어떤 국가가 지구 전체의 패권국이 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특히 2차대전 당시 15만6000명의 대군을 유럽대륙으로 실어 날라야 했던 초유의 상황에서 처칠과 루스벨트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죠(이하 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까치, 2016년) 참고)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엄청난 살육전을 겪은 스탈린이 독일군의 분산을 위해 영미 연합군의 서부전선 진격(상륙작전)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양국이 이를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그로부터 1년이 넘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전쟁 발발 후 불과 3개월 만에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이 얼마나 기적적으로 이뤄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대규모 병력과 전차, 대포 등 중화기를 한꺼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전차상륙함(LST)을 개발하고, 이를 수 백대 양산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수심이 얕은 연안에 침투하려면 LST의 바닥이 평평해야하는데, 이러면 높은 파도가 칠 때 배가 쉽게 뒤집힐 수밖에 없죠. 이 같은 기술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영미 양국이 치열하게 노력한 끝에 바닷물을 채우거나 빼는 평형수 방식으로 무게중심을 잡는 LST를 개발하는데 성공합니다.

해안의 자연 조건도 상륙작전의 어려움을 가중시킵니다. 예컨대 밀물 때는 상륙 시 기뢰와 같은 수중 장애물에 당할 위험이 커지고, 썰물 때는 상륙부대가 해변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거리가 길어져 적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는 달빛을 받으면서 야간에 이동할 수 있는 시간까지 감안해 만조 3시간 전 상륙을 결정하죠.

특히 인천의 경우 조수간만의 차이가 크고 갯벌이 펼쳐지는데다 해안이 상대적으로 협소해 상륙작전에 어려움이 컸습니다. 실제로 작전 당일 돌격용 장갑차들이 갯벌에 발목이 잡혀 가까스로 우회 기동을 하는 난관에 부닥치기도 했죠. 상륙작전 장소로 인천을 지목한 맥아더의 결정에 미 합참이 반대하고 나선 이유입니다.

인천으로 결정되기까지

인천상륙작전 당시 함상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장군(가운데)과 참모들. 성공적인 작전 결과에 다들 표정이 밝다. 전쟁기념관 제공
맥아더는 개전 초부터 인천 상륙작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이하 김대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요인에 대한 군사전략적 분석>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8년) 참고) 전국 도로와 철도가 집중된 서울이 북한군 병참선의 핵심인데다, 수도 점령의 높은 상징성이 적군의 전투의지 무력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이에 따라 전쟁 발발 한 달도 안 된 7월 22일에 미 해병대와 제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키는 내용의 작전명 ‘블루하트(Blue Hearts)’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의 남진이 전광석화처럼 이뤄져 1기병사단을 방어 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7월 10일경 블루하트 작전을 일단 접습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일거에 판세를 뒤집으려면 상륙작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관련 계획을 다시 추진합니다. 이에 따라 미군 합동전략기획작전단은 인천, 군산, 진남포, 해주, 원산, 주문진 6곳의 상륙작전 가능성을 검토한 뒤 인천(l00-B),군산(100-C),주문진(l00-D) 상륙계획을 각각 세웁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 크롬철광)’ 입니다. 크로마이트는 은백색의 광택이 나는 단단한 금속으로 제철 원료로 쓰이는 물질이죠.

당시 미 합참은 인천상륙의 위험이 크다고 보고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육군 및 해군 참모총장을 맥아더에게 보냈지만, 도리어 맥아더는 이들을 설득시켜 자신의 뜻을 끝까지 관철시킵니다. 결국 미 제1해병사단이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진격하는 동시에 낙동강전선의 미 8군이 동시에 압박하는 작전이 확정됩니다.

인천과 노르망디 닮은꼴: ① 성공적 기만 작전

썰물 때 노르망디 해변에 진입한 전차상륙함(LST)들에서 차량 등 각종 장비들이 하역돼 늘어서 있다. 위키피디아
인천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모두 적군에 의해 어느 정도 예상됐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시기와 장소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허를 찔린 거죠. 이것이 가능했던 건 철저한 기만 작전이 먹혔기 때문입니다. 상륙지가 아닌 엉뚱한 곳을 공격하거나, 공격할 것처럼 보이도록 속이는 게 대표적입니다.

6.25 전쟁에서는 인천상륙 이틀 전 미군 함정이 강원도 삼척과 함경남도 마양도를 포격하는 등 정반대편의 동해안 일대로 시선을 끕니다. 통상 상륙 직전 해안지대를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하는 수순을 감안한 거죠. 이와 함께 크로마이트 계획 중 한곳이었던 군산에 상륙한다는 역정보를 흘리고 이곳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군산시민들을 대상으로 해안에서 대피하라는 전단을 살포하고 군산 주변 도로와 교량, 철도에 대한 공중폭격도 실시합니다. 상륙 바로 전날(14일)에는 포항 북쪽 장사동에 상륙작전을 벌여 100여 명의 아군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죠.

언론 보도도 이용했습니다. 10월 이후 인천에서 상륙작전이 실시될 수 있다는 전망 기사를 흘린 겁니다. 이는 작전 개시 일자를 속이는 동시에 언론에 공개된 인천은 상륙지가 아니라는 확신(역정보)을 적군에게 심어주기 위한 포석이었죠.

2차 대전에서도 노르망디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빠드깔레로 상륙지점을 속이기 위한 기만 작전이 실시됩니다. 빠드깔레는 도버 해협에서 최단 거리에 위치한 곳이라 이전부터 유력한 상륙 거점으로 여겨졌죠. 연합군은 빠드깔레 맞은 편인 켄트와 서식스에 상륙부대를 집결시킨 것처럼 꾸미고, 빠드깔레 등에 대한 항공정찰 횟수를 늘립니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노르망디는 연합군의 양동작전 대상에 불과하며, 주력부대의 상륙지는 빠드깔레라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노르망디가 아닌 빠드깔레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는 결정적 실책을 범하게 되죠.

인천과 노르망디 닮은꼴 ②: 기습적 vs 소모전

6.25전쟁 당시 압록강을 건너는 중국군 부대. 위키피디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전술은 적의 후방을 갑자기 때리는 ‘기습전’과 장시간 정면전을 벌여 상대를 탈진시키는 ‘소모전’으로 나뉩니다. 어느 것이 최적의 전술인지는 아군과 적군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상륙작전은 적의 후방을 갑자기 공격한다는 점에서 기습전에 가까운 전술입니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전면전을 벌이며 장시간 대치하는 소모전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기습전으로 불의의 일격을 당하자, 중국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는 낙동강전선의 북한군 병력을 줄여 서울로 투입하고, 나머지 부대들도 북쪽으로 이동시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는 전략을 권고합니다.

일시 후퇴를 통해 차후를 기약하자는 현실론이었는데, 김일성은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낙동강전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존의 소모전을 유지한 거죠. 이는 결국 서울 탈환에 이은 연합군 북진이라는, 북한으로선 재앙적인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2차 대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당시 소련과 동부전선에서 소모전을 벌이던 독일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따른 연합군의 기습전으로 후방이 위태롭게 됩니다. 이에 1944년 6월 17일 히틀러는 프랑스 수아송 근처에서 서부전선 사령관 롬멜, 룬트슈테트를 불러 긴급회의를 엽니다. 이 자리에서 두 장군은 병력을 동쪽의 센강으로 일단 후퇴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하죠. 하지만 히틀러는 프랑스 서부지역을 한 뼘도 포기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해 화를 키우게 됩니다.

인천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모두 기습전에 당한 상대국 지도자가 기존 전술을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다 뼈아픈 패배에 이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북한군의 패주로 6.25 전쟁에 개입한 중국은 북한이라는 완충 지대를 얻는 대신 대만 수복의 기회를 잃고, 이후 미중수교까지 20년 넘게 미국 등 서방진영으로부터 고립돼 저성장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코앞에서 핵 실험을 벌이며 수십년간 원조를 받아가는 ‘골칫덩어리’ 동맹국을 얻은 건 덤이었죠. 이런 측면에서 중국이 6.25 전쟁의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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