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건축 세계 <8> 시네마 천국] 삶으로 투영된 예술과 ‘빛의 캔버스’ 홍콩 엠플러스 뮤지엄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1988년 작,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은 영화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가상 마을 ‘지안칼도(Giancaldo)’를 배경 삼는다. 복잡한 골목길과 작은 주택들로 둘러싸인 마을 광장 한편에 작은 극장 ‘시네마 천국’이 자리한다. 영사기로 영상을 투사하기 위해 어두운 환경이 조성됐다. 내부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모습이다.
그러나 영화 속 극장 공간은 마을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감정을 공유하고 결속하는 또 하나의 광장으로 묘사된다. 영화를 관람하면서 주민들은 함께 웃거나 분노하며, 주인공의 슬픈 이야기에 눈물을 흘린다. 스크린 속 악당이 벌을 받을 때는 일제히 손뼉을 치며 공동의 기쁨을 나눈다. 이러한 모습은 정숙함이 엄격하게 요구되는 현대사회의 극장과 사뭇 다르다. 느슨하고 열린 분위기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가운데, 주민들이 물건을 던지며 다투거나 장난치며 폭소하는 장면들은 영화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일부분임을 보여준다. 마을 주민들이 나이, 학력,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영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는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누군가의 삶’을 전달하는 영화의 특성 덕분이다. 관객은 영화 속 삶을 통해 현재 자신의 삶을 감각하고 반추하며 일상을 이어 간다. 삶과 영화를 동일시하는 ‘시네마 천국’의 관점은 ‘영화를 소재로 한 영화’라는 이중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더욱 강조된다. 극 중에서 스크린 속 타인의 삶에 열광하던 주인공 토토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삶 역시 큰 관점에서는 영화의 소재로 기능한다. 어린 시절 토토의 우정과 사랑은 극 중 토토에게는 개인적인 삶일 뿐이지만, 이를 관람하는 우리에게는 영화 속 아름다운 삶으로 감각된다. 따라서 영화는 단지 카메라에 비치지 않았을 뿐, 모든 이의 삶은 충분히 극적이며 누구나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일상의 풍경과 중첩된 영화 이미지
영화와 현실의 의미적 중첩은 극 중 한 장면에서 시각적으로 극대화된다. 어느 날 저녁, 극장 앞 광장은 매진된 표로 인해 입장하지 못한 군중으로 붐빈다. 그들은 영사실 발코니에 서 있는 토토와 알프레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알프레도가 영사기의 렌즈를 서서히 돌리기 시작하면서 그 각도에 따라 빛의 마술처럼 영상이 반사돼 움직인다. 스크린에 고정됐던 이미지는 이제 영사실 벽을 따라 작업 도구, 수건, 포스터 위를 천천히 흐른다. 그리고 나무 창틀을 통과해 광장의 분수대를 넘어 마침내 2층 주택의 벽면 위에 상을 드리운다. 여기에서 광장은 마을 주민들의 삶이 공유되는 일상의 중심 장소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협업 활동을 하고 극장에서 본 영화에 대해 토론하며, 누군가의 복권 당첨 같은 가십거리를 공유하고, 마을을 떠나는 이웃들을 배웅한다. 따라서 이 장면은 일상과 비일상이 중첩되는 풍경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주민들이 영화를 즐기는 사이, 영상이 투사되고 있는 주택의 주인이 소음에 놀라 2층 발코니의 문을 열고 나오는 해프닝도 벌어진다. 이를 통해 하나의 프레임 속에 영화의 가상 인물과 현실의 실재 인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독특한 순간이 펼쳐진다.
새롭게 발견된 일상 공간
2021년에 새롭게 문을 연 홍콩 ‘M+(엠플러스 뮤지엄)’는 아시아 최초의 현대 시각 문화 뮤지엄이다. 스위스 건축가 헤르조그 앤드 드뫼롱(Herzog & de Meuron)이 설계한 M+는 1만7000㎡에 이르는 33개의 갤러리와 3개의 극장에서 홍콩과 아시아를 넘어 그 영향을 받은 서구 작가들의 영상, 시각 미술 그리고 건축 등의 작품을 아우른다. 건축가는 설계 과정에서 일상적인 요소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M+만의 독특한 예술 경험 공간을 탄생시켰다. 설계 당시 서구룡 문화 지구에 위치한 미술관 부지 하부에는 공항 고속철도 터널이 대각선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건축가는 거대한 콘크리트 다발의 기반 시설을 제약으로 여기지 않고, 미술관 공간을 정의하기 위한 실마리로 삼았다. 유적지 발굴 현장처럼, 터널의 윤곽을 따라 땅을 굴착한 결과, 구조물의 요철 형태가 드러난 동굴형의 전시 공간이 탄생했다. 일상의 삶에서 묵묵하게 기능하던 구조물이 미술관을 상징하는 예술 작품이자 핵심 공간으로 드러난 셈이다. 이를 통해 미술관은 특정한 장소의 특성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대지 위에 견고하게 안착하게 된다. 이 특별한 전시 공간은 ‘발견된 공간(Found Space)’으로 명명됐는데, 일상에 쓰이는 기성 제품에 예술 작품으로서 지위를 부여한 현대미술 개념인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를 연상시킨다. 평범한 소변기를 예술품으로 승화한 마르셀 뒤샹의 1917년 작, ‘샘(Fountain)’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M+의 ‘발견된 공간’은 지하와 지상층이 통합된 높은 층고와 장방형 평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두 번째 질서’를 통해 방문객에게 다양한 시각으로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선사하면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삶의 일부가 된 예술 이미지
M+의 전체 구조는 ‘발견된 공간’을 중심으로 한다. 저층 플랫폼 위로 두 개의 박스 공간이 거꾸로 된 ‘T’ 자 형태로 놓이면서 완성된다. 하부의 수평적인 박스 공간에는 갤러리들이 직교 격자를 따라 배치되고, 상부의 수직 타워에는 연구 시설, 예술가 입주 스튜디오 그리고 큐레이터 센터 등이 있다. 타워의 얇고 긴 형태는 내부 전체의 연구 및 학습 프로그램에 자연 채광과 광활한 도시 전망을 제공한다. 건축가는 일사량 조절을 위해 타워 입면에 수평 루버를 계획하면서 특별히 빅토리아 하버를 향한 면에는 수천 개의 LED 조명 시스템을 통합 설치했다. 이를 통해 65m 높이와 110m 폭을 가진 M+의 입면은 저녁이 되면 거대한 빛의 캔버스로 변모한다. 홍콩섬에서 바라볼 때 최대 1.5㎞ 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M+의 미디어 파사드는 형형색색의 마천루들이 즐비한 빅토리아 하버의 야경과 어우러지면서 강력한 예술 이미지를 투사한다.
미술관의 전시 일정처럼 해마다 다수의 작가를 선정해 일정 기간 상영할 작품을 의뢰하는데, 올해 10월부터 연말까지는 인도네시아의 멀티미디어 콜렉티브 그룹, 트로마라마(Tromarama)의 작품 ‘성장하는 기둥(Growing Pillars)’이 상영될 예정이다. 매일 수천 명의 관람객이 일상적인 공간 위에 중첩된 역동적인 예술 이미지를 감상하며 놀이, 유머, 시, 지적 성찰, 혹은 명상적 사색의 순간을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일상과 예술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 상황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 또한 예술처럼 치열하고,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에서 토토가 마을을 떠나 더 큰 꿈을 펼치기를 종용하던 알프레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은 영화와는 달라. 인생이 훨씬 힘들지. … 마지막에 무엇을 하든 그것을 꼭 사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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