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사진집 이야기 <68> 자멜 샤바즈(Jamel Shabazz)의 ‘앨범(Albums)’] 거리 사진가의 진정성 있는 소통에 대한 기록
거리에서 처음 마주친 낯선 사람의 사진을 찍을 때 거리 사진가는 보통 다음의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첫째는 피사체로부터 자기 존재를 들키지 않으면서 촬영하거나 혹은 이 과정에서 상대가 사진 찍히는 걸 눈치채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하는 것이다. 이 방식에서 사진가는 피사체와 상호작용을 가능한 한 피하면서 현실의 단면을 생생하게 포착하려고 한다. 둘째는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고 동의를 얻은 후 촬영하는 방식이다. 이때 사진가는 인물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이들을 사진에 참여시킨다.
자멜 샤바즈(Jamel Shabazz)는 후자의 방식으로 인물을 촬영하는 거리 사진가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브루클린, 퀸스, 웨스트빌리지, 할렘 등에서 초상사진을 찍기 시작해 40년 넘게 뉴욕 흑인 커뮤니티를 담아 왔다. 거리를 자신만의 사진 스튜디오로 삼아 작업해 온 샤바즈의 사진에는 뉴욕 전역의 문화적 변화와 투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진에서 인물은 대체로 프레임 중앙에서 카메라를 직접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포즈를 취한다. 홀로, 혹은 동행자와 함께, 때로는 단체로 담겨 있기도 하다. 거리뿐 아니라, 지하철이나 자동차 안 같은 공간도 등장하고, 공원 벤치, 공중전화 부스, 붐박스, 그라피티가 그려진 벽 등 다양한 요소가 자연스레 사진에 녹아들어 시대상을 보여준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촬영 승낙을 얻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샤바즈는 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옷을 잘 갖춰 입고 35㎜ 카메라를 손에 들고 거리로 나와 거리에서 흥미로운 인물을 발견하면 그는 ‘사진가’라고 적힌 자신의 정식 명함을 건네며, 사진 촬영을 권했다. 그가 자주 한 말은 이 말이다. “당신을 보면 위대함이 보입니다. 괜찮으시다면 당신의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샤바즈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실하고 따뜻한 자세로 설명했다. 촬영에 쉽게 승낙하는 사람도 있지만, 망설이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그가 가방에서 꺼내는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촬영한 거리 사진이 가득 담긴 사진 앨범이었다.
샤바즈는 거리에서 인물을 촬영한 후, 한 시간 내로 사진을 빠르게 현상·인화해 주는 차이나타운의 한 현상소에서 사진을 두 장씩 프린트하곤 했다. 그는 몇 시간 혹은 며칠 내에 촬영 장소로 다시 돌아가, 한 장은 사진의 모델이 되어준 사람에게 전달하고, 다른 한 장은 언젠가부터 자신의 사진 앨범 속에 정리해 넣기 시작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사진을 무작위로 앨범에 넣는 대신 몇 가지 분류법을 택하게 되었다. 장소의 종류, 촬영된 인물의 수, 성별, 스타일, 포즈 등으로 사진을 분류해 앨범에 보관했다. 작업을 정리하면서 일종의 편집 과정을 거친 셈이다.
보통의 사진 앨범이 집 어딘가에 넣어 두고 이따금 꺼내 보는 용도로 사용된다면, 샤바즈에게는 달랐다. 샤바즈에게 있어 사진 앨범은 자신의 작업을 어디서든 보여주는 도구, 즉 휴대용 포트폴리오 역할을 했다. 그는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사진 앨범을 보여줌으로써 사진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특히 촬영에 머뭇거리고 망설이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는 가방에서 자신의 사진이 가득 찬 앨범을 꺼내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이 촬영에 참여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그의 앨범을 보며 짐작할 수 있었다. 앨범은 샤바즈가 처음 본 사람의 신뢰를 얻어내 이들을 사진 작업에 참여시키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샤바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을 멈춰 세우고 그들의 관심을 끌어내야 했는데, 앨범이 이를 해냈다. 내 앨범이 없었다면 아마 이들은 자기 갈 길을 갔을 것이다.”
샤바즈의 카메라 앞에 서서 사진을 찍은 수많은 사람을 보여주는 그의 앨범은 그다음 사람들을 그저 참여시키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이 앨범은 다음 참여자가 이전 참여자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참조하도록 유도한다. 샤바즈의 사진에서는 그의 지휘 아래, 인물 내면의 자신감이 얼굴과 포즈를 통해 드러나고, 때로는 적극적인 자세와 개성 있는 패션을 통해 거리의 익명 인물들이 각자의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앨범은 다음 참여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자신감 있게 드러내고 표현하도록 독려한다. 이미지는 모방되고 새롭게 쓰이길 반복한다.
‘앨범(Albums·Steidl·2023)’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촬영된 샤바즈의 이러한 거리 사진을 담은 책이다. 책의 디자인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사진 앨범이라는 형식이다. 오래된 빛바랜 느낌의 면지로 시작하는 이 책은 가장 먼저 샤바즈가 들고 다닌 명함이 등장한다. 그리고 12개의 앨범 표지와 각 앨범에서 선별한 페이지가 원형 그대로 재현돼 차례대로 전개된다.
앨범에서 사진을 각각 꺼내 사진만을 따로 수록하는 대신, 앨범 안에 보관된 상태 그대로 사진을 보여줌으로써, 이 책은 샤바즈의 실제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는 듯한 인상을 주도록 디자인됐다. 이를 통해 샤바즈가 거리의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했는지를 독자들이 간접적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이 책은 그가 거리에 수없이 들고 나간 실제 앨범의 복제본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단순히 샤바즈가 자신의 프린트를 어떻게 보관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이 책은 그의 사진을 가능하게 한 주요한 소통 수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그의 작업 과정을 엿보게 해준다. 앨범을 통해 경계심이 허물어진 인물들은 카메라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우호적으로 포즈를 취한다. 이때 거리는 무관심으로 가득 찬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고 서로를 환대하는 공간으로 탈바꿈된다. 이 책은 사진가가 대상을 최선의 마음으로 대하고, 이들이 사진가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될 때, 거리 사진이 단순히 인물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인물의 진정성 있는 삶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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