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린 광화문 월대와 日 박물관 정원 고려석탑… 조선궁궐잔혹사 [일본 속 우리문화재]

강구열 2023. 10. 1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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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경복궁에서 개최한 공진회는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일제의 한반도 지배 5년 간의 성과를 보여주겠다며 개최한 자화자찬의 대규모 이벤트였다.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공진회 개회사 중 일부다.

대규모 부지를 마련하는 데 용이하고, 신·구정의 대비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상징성을 가진 경복궁이 공진회장으로 선택됐다.

불교문화의 산물인 석탑은 왕조 내내 억불정책을 고수한 조선궁궐과 어울릴 수 없는 것이었으나 안중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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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경복궁 광화문 월대. 연합뉴스
복원된 경복궁 계조당. 문화재청
#1. 경복궁 광화문 월대가 복원됐다. 월대를 갖춘 광화문 사진을 보니 그것이 없던 예전 광화문은 옹색해 보인다는 느낌마저 든다. 지난달에는 경복궁 동궁 권역에 있던 계조당이 다시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두 일제가 훼손했다. 특히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5년 조선물산공진회’(공진회)와 관련이 깊다. 
 
#2. 이천오층석탑은 도쿄 미나토구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 앞마당에 서 있다. 6.48m 높이의 고려시대 탑이다. ‘일본 최고(最古)’임을 자부하는 이 박물관 소장품 약 2500건 중 하나다. 경기도 이천의 한 향교 인근에 서 있던 오층석탑이 일본으로 유출된 계기가 공진회다.  
 
일제의 조선궁궐 훼손은 집요하다 할 만큼 강점기 내내 이어졌다. 조선 제1궁궐인 경복궁은 물론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을 망가뜨렸다. 공진회는 결정적 장면이다. 광화문 월대, 계조당의 복원이 이때 입은 상처의 치유라면 오쿠라슈코칸 오층석탑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아픔이다.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공진회, 조선궁궐잔혹사 결정적 장면

일제가 경복궁에서 개최한 공진회는 경술국치(1910년) 이후 일제의 한반도 지배 5년 간의 성과를 보여주겠다며 개최한 자화자찬의 대규모 이벤트였다.

“본 공진회 개최의 취지는…신구시정(新舊施政)의 비교대조를 밝혀서 조선민중에게 신정(新政)의 혜택을 자각하게 하고…그 결과 조선인으로 하여금 깊이 스스로 반성계발해서 폐습을 고치고…”

당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공진회 개회사 중 일부다. ‘신정’은 일제의 통치, ‘구정’은 조선의 통치를 의미한다. 농업, 임업, 광업, 교육, 위생 등 사회 주요분야와 관련된 전시관 15개를 만들기로 했다. 대규모 부지를 마련하는 데 용이하고, 신·구정의 대비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상징성을 가진 경복궁이 공진회장으로 선택됐다. 궁궐 주요 전각이 철거 혹은 훼손됐다. 계조당, 광화문 월대가 없어지고, 훼손되기 시작한 게 이때다. 

공진회장을 꾸민다며 전국 각지에서 석탑도 가져왔다. 불교문화의 산물인 석탑은 왕조 내내 억불정책을 고수한 조선궁궐과 어울릴 수 없는 것이었으나 안중에 없었다.   

오쿠라슈코칸 정원의 이천오층석탑.
오쿠라슈콘칸 정원에 나란히 서 있는 석양, 문석인, 오층석탑
◆일본 박물관 정원석이 된 고려석탑

오쿠라슈코칸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가 세웠다. 니가타현 출신으로 17살에 도쿄로 상경해 건어물점을 열어 사업을 시작했다. 청·일, 러·일전쟁 등을 거치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지금도 일본 제일로 꼽히는 제국호텔, 오쿠라호텔이 오쿠라의 손을 거쳤다. 교육, 문화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1902년 자택에 오쿠라슈코칸의 앞선 버전인 오쿠라미술관을 만들고 일본은 물론 한국, 중국 등의 유물 수집에 나섰다.

이런 이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박물관 출입구 양쪽 정원에 자랑하듯 세운 한국, 중국 문화재다. 오층석탑은 석양 1점, 문석인 2점과 나란히 서 있다. 오층석탑은 일제가 박람회장을 꾸미겠다며 무단으로 옮긴 전국 각지의 석탑 중 하나였다. 그것을 오쿠라가 일본으로 다시 빼돌린 것이다. 오쿠라슈코칸 정원에는 평양율리사지석탑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불법 유출이 분명한 오층석탑의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지만 오쿠라슈코칸은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경복궁의 자선당 유구
◆천신만고 귀향 자선당 유구…끝나지 않은 유랑

오쿠라슈코칸과 한국의 악연을 보여주는 또 다른 흔적이 경복궁 자선당 유구다.

계조당처럼 세자가 쓰던 건물이었던 자선당은 공진회 준비 과정에 철거됐다. 당시 철거된 자선당의 자재를 사들인 게 오쿠라였다. 그는 이걸 일본에서 재조립한 뒤 ‘조선관‘이란 이름을 붙여 개인미술관으로 활용했다. 강제로 뽑혀 나간 것이긴 했으나 옮겨진 그 곳에서라도 온전했으면 좋았겠건만 자선당은 불운은 끝이 아니었다.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건물은 소실됐고, 기단만 남은 채 긴 세월을 견뎠다. 

1993년, 김정동 당시 목원대 건축과 교수가 자선당 유구의 존재를 한국에 알리면서 귀향의 계기가 마련됐다. 오랜 협상 끝에 오쿠라 호텔이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1995년 유구석 288개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선당 유구는 경복궁의 가장 북쪽 건청궁 옆 녹산 옆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자선당이 있던 곳으로 돌려 놓고 그 위에 건물을 복원했다면 80년 만의 귀환이 더욱 빛났을 것이나 그러질 못했다. 간토대지진 당시 불을 먹어 약해진 상태로 오랜 시간이 흘러 건축자재로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복궁에서 가장 깊은 곳,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누가 갈까 싶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자리에는 1999년 자선당이 복원됐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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