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리스트 바 ‘페이지스’ 이근욱 대표

정세영 기자 2023. 10. 17.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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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돋는 3000여 개 사연과 플레이리스트가 쌓여있어요”

술은 물론 타인의 이야기와 플레이리스트까지 감상할 수 있는 페이지스. 해가 떨어진 밤, 낮은 조도의 조명들이 은은하게 공간을 밝히기 시작하면 이곳은 더욱 빛을 발한다. 

플레이리스트 바 ‘페이지스’ 이근욱 대표
현실을 도피하는 방법 중 하나로 좋아하는 바에 가길 추천한다. 특별한 지역에 위치한 것도 아닌데 바에는 몽환과 환상의 공기가 흐르는 듯하다. 오직 음악과 술로 이런 무드를 자아낼 순 없다. 주인장의 감각으로 큐레이션한 크고 작은 소품, 희미한 조명 아래 소곤거리는 사람 등 다양한 것이 섬세하게 갖춰졌을 때 가능한 일이다.

플레이리스트 뮤직바 '페이지스’는 직장인이자 플레이리스트 수집가 이근욱 대표가 완성한 공간이다. 손님들의 사연과 플레이리스트를 수집해 하나의 콘텐츠를 만드는 곳으로 부모님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차별화된 콘셉트와 유니크한 인테리어로 개성과 취향을 중시하는 MZ들을 저격한 성수동 '핫플’이다.

서울 성수동에서 페이지스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대림창고 맞은편에서 "What’s on your playlist?"라고 적힌 노란색 셔터를 찾으면 된다. 왼쪽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빈티지한 포스터가 제각각 붙어 있는 노란색 문이 나온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페이지스만의 낭만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페이지스는 66㎡ 남짓한 공간으로, 곳곳에 페이지스의 정체성을 응축해놓은 감각적인 소품들을 진열해놓았다. 야경이 잘 보이는 커다란 창문 앞에는 아담한 테이블과 의자가 배치돼 있고, 테이블 위에는 헤드폰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벽면에는 이근욱 대표의 취향을 담은 내추럴 와인이 가득하다. 이근욱 대표는 와인을 모두 마셔본 뒤 자신의 사연을 담은 사적인 페어링을 제작해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중앙에 위치한 노란색 데스크다. 오렌지색 JBL 스피커가 장착된 데스크에는 디제잉 기계와 헤드폰, 키보드, 컵, 조명 등이 올려져 있다. 데스크 뒤 벽면에 설치된 2개의 모니터에서는 누군가의 이야기와 플레이리스트가 감각적인 이미지와 함께 흐르는 중. 무심하게 툭툭 배치된 소품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에선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이근욱 대표의 미적 감각 또한 엿볼 수 있다.

손님은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에디터

손님들이 남기고 간 사연과 플레이리스트.
페이지스는 손님들의 사연과 음악을 공유할 수 있는 독특한 곳이에요.

페이지스의 콘셉트는 '페이지를 담는 공간’이에요. 손님들이 오면 페이지에 자신의 사연과 플레이리스트를 적어서 저에게 건네주세요. 저는 그걸 다시 타이핑해 스크린에 띄운 뒤 해당 음악을 들려드리고요. 손님들은 서로의 사연과 음악을 공유하며 술과 음식을 즐기죠.

사연을 받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사연은 음악을 공유하기 위한 매개체거든요. 손님 대부분이 평소 안 좋아하거나 모르는 음악을 들어도 사연에 공감되는 부분이 있으면 더 집중해서 들으시더라고요.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기도 하고요. 평소 이렇게 음악에 몰두하거나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갖긴 힘들잖아요. 잠시나마 이런 소중한 시간을 만끽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손님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죠.

음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아요,

장르 구분 없이 음악을 정말 좋아해요. 취미로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밴드 활동도 했었고요. 어렸을 때는 친구들과 함께 음악 파티를 연 적도 있어요. 음악이 너무 좋아서 가수를 해볼까 진지하게 고민도 했는데 재능이 없더라고요(웃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음악이고, 잘할 수 있는 일은 기획이거든요. 언젠가는 이 둘을 조합해 멋진 걸 만들어내야겠다고 생각했죠. 페이지스를 통해 그 꿈을 이룬 거고요.

*이근욱 대표가 여성동아 독자들을 위해 추천한 페이지스. 감성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인터뷰를 읽어보길 추천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요.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사연에 이름이나 나이 등 개인정보를 적진 않지만 어쨌든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울 수 있죠. 또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도 막막하고요. 무엇보다 페이지스 자체가 집중해서 무언가를 쓸 수 있는 공간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운영 방식을 조금 바꿔보려 해요. 페이지스가 스토리를 먼저 제시한 뒤 플레이리스트만 적어달라는 형식으로요. 스토리는 노래 가사에서 따올 예정이에요. 이렇게 되면 사연을 써야 하는 압박감은 덜고 플레이리스트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페이지스는 손님들이 사연을 모으고 편집하는 매거진 회사처럼 느껴져요.

맞아요. 손님들은 페이지스에서 자신의 취향을 편집해 콘텐츠로 생산해내는 사람이기도 해요. 쉽게 말하면 에디터죠. 그 콘텐츠가 모이면 하나의 매거진이 탄생하는 거나 다름없고요. 페이지스는 오피스 공간을 모티프로 인테리어했어요. 공간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노란색 테이블은 에디터 데스크를 상징해요. 플레이리스트를 만드신 분이 테이블 뒤 의자에 앉고 스크린에서 사연과 플레이리스트가 나오면 공간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데, 의자에 잘 앉진 않으시더라고요.

페이지스에서 가장 많이 플레이되는 가수는 누구죠.

검정치마요. 이곳의 빈티지한 분위기가 검정치마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아이돌 가수의 노래는 거의 신청을 안 하세요.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는 곡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보석 같은 곡들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인 듯해요.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 사연의 플레이리스트.
손님이 음식과 술을 즐기는 테이블은 사선형이에요. 의도한 건가요.

일부러 사선형으로 제작했어요. 테이블 서랍에 넣어둔 펜, 메뉴판 등이 잘 보였으면 했거든요. 모서리 부분에 너지를 줘서 자연스럽게 서랍에 넣어둔 콘텐츠들이 드러나게 만든 거죠. 실제 오피스를 연상시키기 위해 화이트와 그레이 컬러를 많이 활용했고요. 그 덕에 페이지스의 상징인 노란색 에디터 테이블이 더 눈에 띄는 것 같기도 해요.

카세트, 필름 카메라 등 소품들이 굉장히 빈티지해요.

카세트를 곳곳에 비치해둔 건 이곳은 음악을 다루는 공간이라는 걸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예요. 에디터 옆에 놓인 LP 플레이어도 마찬가지고요. 카메라, 노트 등은 편집과 취재를 하는 에디터라는 키워드에서 따온 것들이고요.

콘셉트는 어디서 영감받았나요.

미국 브루클린의 전시 공간인 스케치북 프로젝트요. 이곳은 입장한 사람들에게 일단 스케치북을 판매해요. 스케치북을 받으면 자신만의 그림을 자유롭게 그려 담당자에게 건넨 뒤 공간에 전시해달라고 하죠. 스케치북 프로젝트는 이렇게 수집한 그림들도 가득 차 있어요. 이 공간을 보는데, 유명 작가의 작품이 아닌 일반인들의 그림을 한 공간에 모아둔 발상 자체가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음악에도 이 방식을 접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오랜 고민 끝에 사연을 통해 다양한 사람의 음악을 모으기로 한 거죠.

처음 페이지스는 어떻게 운영됐나요. 손님들의 플레이리스트가 없었을 텐데요.

서랍 속에 '플레이리스트 100’이라는 얇은 책자가 있어요. 1번부터 50번까지는 제가 직접 썼고, 51번부터 100번까지는 친구와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를 모아 리스트업했어요. 처음에는 이 플레이리스트를 활용해 운영했어요. 지금 '플레이리스트 100’은 손님들의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어떤 방식으로 사연을 쓰고 플레이리스트를 기록해나가는지에 대한 모델링 역할을 하죠. 모든 사연 밑에는 QR코드를 붙여놓았어요. QR코드를 찍으면 유튜브로 넘어가 바로 플레이리스트를 감상할 수 있죠. 테이블 위에 걸어둔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즐기면 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다면요.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라는 사연의 플레이리스트인데요. 정확한 스토리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바람피웠던 남자 친구들을 모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드셨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생일에 다른 여자와 스키장 갔던 놈, 군대 가서 바람피운 놈, 헤어지고 바로 다른 여자와 뽀뽀하는 사진으로 프사를 바꾼 놈 등 해당 사연이 노래와 너무 잘 맞아떨어지거든요. 심심할 때 한번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직장과 창업,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현생러 이근욱 대표

서울재즈페스티벌과 함께한 제작물도 눈에 띄어요.

서울재즈페스티벌(이하 서재페) 측에서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플레이리스트라는 콘텐츠를 함께 구체화해보고 싶다고요. 그래서 저희가 가지고 있는 플레이리스트 중 서재페 출연진의 노래가 담긴 사연을 모아 하나의 콘텐츠를 완성하게 됐죠. 페스티벌 당일 부스를 운영해 오시는 분들에게 나눠드렸고요.

서재페는 이 콘텐츠를 왜 만들려고 했을까요.

음악이라는 키워드를 두고 '사람들이 어떻게 즐기고 있느냐’를 분석했던 것 같아요. 가장 쉬우면서도 대중적인 것이 플레이리스트였고요. 또 플레이리스트를 직접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찾다가 페이지스를 발견하고 제안해주신 것 같아요.

직장을 다니는 걸로 알고 있어요. 투잡을 뛰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그렇죠. 낮에는 IT업계 회사의 서빙로봇 전략 파트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밤에는 페이지스를 운영해요. 평일 기준으로 하루에 18시간 정도 일하고 있네요(하하). 주말에는 보통 늦잠을 자거나 밀린 미팅 또는 디자인, 콘텐츠를 제작하는 편이에요. 다 끝내지 못하면 평일 회사 점심시간을 활용하고요.

직장을 그만두고 가게에 집중할 생각은 안 해봤나요.

페이지스를 더 잘해보고 싶은 욕심에 본업을 놓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자본이 뒷받침되려면 고정 수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요. 또 페이지스 콘셉트가 생소하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가 거의 없어요. 계속 투자하면서 실험해야 하죠. 저는 마음의 여유가 굉장히 중요해요. 여유가 없으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페이지스가 상업적으로 변모하지 않고 지금의 콘셉트를 고수하려면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 두 가지 일을 모두 해내고 있고요. 물론 육체적으론 정말 힘듭니다.

와인과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페이지스. 성수동 대림창고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오픈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준비 기간을 1년 정도 잡았는데, 실제 2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모든 걸 혼자 해나가야 했기 때문에 너무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렸죠. 페이지스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물론 소품 하나하나를 모두 제 의도가 반영된 것들로 채우고 싶었거든요.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걸 과연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줄까’라는 의구심에 콘셉트 자체를 트렌디한 걸로 바꿔보기도 했거든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과정 자체도 재미없고, 잘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어서 자신감이 떨어지고요. '망하든 말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로 밀고 나가자’는 생각에 계획했던 걸 모두 접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어요. 기획을 더 탄탄하게 잡고 매 순간 콘셉트를 놓지 않으면서 페이지스를 완성해나간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거라 예상하셨나요.

확신은 없었지만 페이지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음악을 좋아하잖아요.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듣는 음악, 최근에 듣고 있는 곡들이 사실 플레이리스트나 다름없고요. 전 이 콘텐츠를 좀 더 컨셉추얼하게 즐길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운영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요.

콘텐츠를 구체화하는 속도가 더딘 거요. 쉽게 말하면 시간이 부족한 거죠. 그래서 더 홍보를 안 하는 면도 있어요. 천천히 가고 싶어서요. 저 혼자 거의 모든 걸 감당하고 있는데, 바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지금은 새로운 손님을 유입하는 것보다 기존 콘텐츠를 디벨로프해 기존 손님들에게 더 좋은 서비스와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빨리 좋은 콘텐츠를 기획해 구체화해야 하고요. 하지만 현생이 너무 바쁘네요.

사연, 플레이리스트 등의 콘텐츠가 수익으로도 연결되나요.

아니요. F&B에 의존하고 있어요. 플레이리스트를 계속 양산하고 좋은 콘텐츠를 소개해드릴 순 있지만 수익모델로 연결하기는 정말 어려워요. 모든 음악에는 저작권자가 있기 때문에 특정 음악을 튼다고 해서 수익을 내긴 힘든 구조니까요. 대신 다양한 업체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부가적인 수익을 창출하고 있죠. 페이지스의 콘셉트를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컬래버 제안을 받고 있거든요. 성사된 것들도 있고요. 이렇게 부가적으로 조금씩 수익을 늘리고 있어요.

페이지스 같은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요즘 많아졌어요.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면요.

제 상황과 비슷한, 직장을 다니면서 창업을 준비하는 분들께 조언 드릴게요. 회사를 절대 그만두지 마세요(웃음). 모든 걸 다 내던지고 가게에만 올인하기엔 금전적·정신적으로 압박받는 것,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렇게 되면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휘둘리기만 하다 끝나버릴 수도 있어요. 육체적으론 정말 힘들지만 경험치와 자본이 쌓일 때까지는 직장을 다니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페이지스 #뮤직바 #가을술집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정세영 기자 sy2823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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