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진열장 밖으로 꺼내자”… 전시 판 뒤집은 파격 제안
4년 전 국립경주박물관 새단장
전시장에 통유리창 ‘공간 혁신’
호림박물관 ‘조선양화’展 등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호평
“젊은 세대는 전시 공간에서
자기 취향과 삶의 철학 찾아”
“박물관 전시기획 해본 적 없죠? 유물을 바깥으로 꺼낸다니….” 2019년 국립경주박물관 새 단장을 위한 프로젝트 회의에서 전시공간 기획을 맡게 된 양태오(42·아래 사진) 디자이너는 이런 면박(?)을 받았다. 신라 토기를 진열장도 없이 관람객 앞에 노출하고, 유물관엔 통창을 내 바깥 풍경을 볼 수 있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내자 박물관 전문가들이 난색을 표하면서다. 기존 전시 문법에 어긋난 과도한 ‘파격’이란 것이다. 양 디자이너는 “유물을 직접 마주하는 사람들이 더 깊게 사유할 수 있지 않겠냐”고 밀어붙였고, 당시 민병찬 박물관장이 “재밌을 것 같은데, 한번 꺼내보지 뭐”라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결과는 미국 타임지가 세계 100대 명소에 경주를 선정하며, 꼭 가봐야 할 장소로 국립경주박물관을 언급하는 대성공이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양 디자이너는 미술계의 ‘미다스의 손’이 됐다. ‘공간의 힘’을 느낀 내로라 하는 박물관부터 미술관, 갤러리가 그에게 SOS를 보내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부터 세계적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의 서울점 개관 공간 디자인 모두 그의 손길을 거쳤다. 최근엔 호림박물관에서 조선 선비들의 식물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한 ‘조선양화(朝鮮養花)’ 전시와 명품 브랜드 샤넬이 한국 공예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선보인 전시에서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으로 호평받았다.
미술계 트렌드를 바꾼 양태오가 생각하는 공간은 무엇일까.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에 위치한 스튜디오 겸 자택에서 만난 양 디자이너는 “박물관은 교육 공간, 갤러리는 그림 파는 공간이라는 견고한 공식이 해외에선 일찌감치 없어졌다”면서 “어떻게 하면 이 공간에 있는 작품이나 유물의 가치와 내러티브(서사)를 더하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호림 전시의 경우 조선 사람들이 꽃과 나무를 기르고 정원에서 휴식하며 창조적이고 깊이 있는 사유를 했다는 게 주제”라면서 “코로나19를 거치며 반려식물 등이 인기를 끌었지만, 우리에겐 어떤 철학이 남았는지를 반문하는 의미를 부여하며 여러 공간 장치를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양 디자이너는 사실 인테리어 디자인 시장에선 일찌감치 ‘스타 디자이너’로 통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유럽에서 디자인 일을 하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10년대부터 전지현 등 스타들의 집을 인테리어하며 명성을 얻었다. 세계적 권위의 아트 출판사 파이돈 프레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 인테리어 디자이너 100인’, 세계적 건축 디자인 잡지 아키텍처 다이제스트(AD)가 선정한 ‘2022년 100명의 디자이너’ 등에 이름을 올리며 글로벌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렸다.
개인적 공간을 의미 있게 꾸미던 그가 박물관이나 갤러리로 스며든 데엔 그가 살고 있는 한옥의 역할이 컸다. “거주하면서 일까지 하는 한옥 고택이 영감의 원천”이라는 그는 “한옥을 망친다는 비판에도 외관은 그대로 유지하고 내부는 나만의 라이프스타일로 꾸며 근대 한옥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박물관에 도전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젊은 미술 애호가들이 늘어나는 등 미술 시장 전반이 변화하는 것도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설명했다. 양 디자이너는 “젊은 세대는 작품을 바라보는 자세가 굉장히 능동적”이라며 “공간에서 작품과 자신의 관계성을 고민하고 취향과 삶의 철학을 찾는다”고 했다.
양 디자이너는 ‘전통의 동시대화’라는 자신의 ‘미션’을 완성하기 위해 앞으로도 다양한 박물관, 미술관 전시공간 기획에 도전할 생각이다. 다음 달 열리는 디자인과 현대미술을 섞은 신개념 아트페어 ‘디파인 서울’(DEFINE SEOUL) 총괄 디렉터를 맡은 그는 “기존 아트페어들이 보여준 장소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도를 했다”면서 “전시장 일부에서 자연광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등 예술을 향유하는 공간과 일상적 삶의 접점을 만들어내려 했다”고 말했다.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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