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영진위, 유인촌 그리고 영화 ‘시’

김진철 2023. 10. 1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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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영화 ‘시’ 스틸컷. 뉴 제공

[뉴스룸에서]  김진철| 문화부장

올해 초 세상을 떠난 배우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영화 ‘시’다. 말썽꾸러기 외손주를 돌보며 동네 문화센터에서 시를 배우는 소녀 같은 할머니 미자 역을 윤정희가 아니면 누가 맡을 수 있었을까. 윤정희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포스터를 바라보자면, 미자가 자작시 ‘아네스의 노래’를 읊조리는 소리가 쓸쓸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2010년 영화 담당 시절 컴컴한 시사회장에서 엔딩 크레디트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 건, 하 수상한 소식들이 잇따르면서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는 내년 영화 창·제작 및 영화제 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폐지하기로 했는데, 2010년 그때도 영진위는 비슷한 작태를 보였다. 영화 ‘시’는 심지어 영진위 지원 공모에서 “시나리오 수준이 낮다”며 무려 ‘0점’을 받고, 두번이나 떨어졌다. 영진위가 외면한 이창동 감독의 ‘시’는 제63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는다. 당시 조희문 영진위원장은 프랑스 칸 현지에서 국내로 전화까지 걸어 독립영화 지원사업에서 특정 작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달라고 부당하게 개입한 사실이 드러난다. 이후 ‘뉴라이트’ 조 위원장은 여러 문제로 해임되고 교수채용 비리로 실형까지 선고받는데, 당시 그를 영진위원장에 임명했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최근 다시 돌아온 유인촌 장관이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그가 참여정부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화와 주연배우는 칸영화제 각본상뿐 아니라 대종상, 대한민국영화대상, 영화평론가협회상, 로스앤젤레스(LA)비평가협회상, 청룡영화상 등을 휩쓸었는데 정작 영진위 지원 공모에서는 두차례나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떨어졌으니 단순히 ‘음모론’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었다. 2017년 국가정보원 개혁위원회가 발표한 ‘이명박 정부 시기의 문화연예계 내 정부 비판 세력 퇴출 건’ 조사 결과에 공개된, 이른바 ‘블랙리스트’ 명단에는 문화계 이외수·진중권, 배우 문성근·문소리, 방송인 김미화, 가수 윤도현·신해철 등을 포함한 ‘강성 성향’ 69명 가운데 영화감독 이창동도 선명히 적혀 있었다.

바야흐로 이명박 정부를 지나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거쳐 윤석열 정부에 이르렀는데, 돌아온 유인촌 장관의 문체부와 영화 관련 지원 역할을 위임받은 영진위에서 또다시 비슷한 일이 일어날 조짐이다. 요새 영화계에선 문체부가 영진위를 앞세워 정부 비판적 영화 제작을 막으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유 장관은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에) 좁은 문을 만들어 철저히 선별해야 한다. 나랏돈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말이 되나”라고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말했다.

‘국가 이익’이란 무엇일까를 되뇌며, 넷플릭스에서 ‘시’를 다시 본다. 웨이브, 티빙, 왓챠 등 다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도 있다.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2010년, 영화기자가 영화 관련 기사보다 영진위원장과 영진위 지원사업 관련 의혹 보도에 더욱 정신없던 그때 안 보였던 것들이 새삼 보이기도 한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영화에서 시를 낭송하는 미자는 살아 있다.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1997) ‘박하사탕’(2000) ‘오아시스’(2002) ‘밀양’(2007)도 다시 본다. 국가 이익이 뭔지 손에 잘 잡히진 않지만 좋은 영화는 공동체와 인류에 생각할 거리와 감동을 준다.

현실을 냉혹하게 직시하며 예술과 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되묻는 ‘시’ 같은 영화는 이제 다시 나오기 어려운 국면으로 가고 있다. 대작 상업영화들조차 손익분기에 이르지 못하고, 영화관은 넷플릭스 등 오티티에 시장을 크게 빼앗겼다. 시간이 지나면 오티티에 풀리지 않는 영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웬만해선 비싼 표에 돈 들이며 영화관까지 가지 않는다. 칸영화제에서 수상하고도 국내에서 21만 관객을 모으는 데 그친 ‘시’ 같은 영화는 공적 지원 없이 사적 투자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시’가 싹트지 못하는 토양에서 ‘오징어 게임’이라고 쑥쑥 자라날 수 있을까? 정부 비판을 ‘국가 이익’ 따위로 막을 때가 아니다.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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