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 “이젠 구속·해고 안 해요, 살인적 무기 손배가압류 있으니까”
제가 2011년 크레인에서 내려왔던 것도 연대의 힘이었고, 노란봉투법도 시민들이 만든 법이잖아요. 하지만 정치권하고 기업인들은요, 우리가 발전한 만큼 더 비열해지고 악랄해졌다고 생각해요.
김주익 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현 HJ중공업) 지회장이 회사의 노조 탄압과 무지막지한 손해배상 청구에 이은 가압류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며 부산 영도구에 있는 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건 2003년 10월17일이었다. 그리고 8년 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김주익이 올랐던 85호 크레인에 다시 올랐다. 그가 버틴 309일간 노조 활동을 억압하는 손배가압류 문제를 환기하는 ‘희망버스’를 타고 수많은 시민이 크레인 앞을 찾아 김 지도위원을 응원했다.
그럼에도 김주익의 죽음 이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쟁의행위에 대한 기업의 무분별한 손배 소송을 막는 내용의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은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12일 민주노총 부산본부에서 김 지도위원을 만나 김주익과 노란봉투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 지도위원은 민주노총 조합원 사이에서 ‘김지도’란 애칭으로 불린다.
김지도는 1987년 김주익을 처음 만났다. 멀리서 봐도 누가 김주익인지 알아볼 만큼 키가 컸다. 김주익이 129일간 고공 농성을 할 때 공장 출입이 저지된 김지도는 공장 근처 산복도로 위에 있던 작은 절 마당에 가서 85호 크레인을 쳐다보곤 했다.
“절이 높은 데 있으니까, 위치가 크레인하고 같았어요. 주익씨가 작업복 입고 그 크레인을 왔다 갔다 하는 게 멀리서도 보여요. 워낙 사람이 크니까. 그러면 저한테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주익씨가 하고 싶은 말, 내가 듣고 싶은 말들….”
8년 뒤 그 85호 크레인에 올라 조종실에 들어간 김지도는 다시 그 큰 키를 떠올렸다. “그 큰 사람이 여기서 어떻게 살았지? 129일을?”이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고 했다. 폭이 좁아 김지도가 누워도 머리와 발끝이 차가운 크레인 철제 벽에 닿았다. 그런 조종실에서 129일을 쭈그리고 있었을 김주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그 당시 참담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컸죠. 주익씨가 그렇게 죽기 전날에 저한테 전화했었어요. 근데 제가 그 전화를 안 받았어요. 상황은 뻔한데, 뭐라고 할 말이 없겠더라고요. 그 벨이 울리는 시간이 정말 길었어요.”
손배가압류는 악랄한 방식으로 김주익을 괴롭혔다. 당시 집까지 가압류를 당한 김주익이 받은 마지막 월급은 총액 165만원. 세금과 가압류 73만원 등을 떼고 공제액을 제외한 실수령액 13만5080원이었다. 크레인에서 내려가면 자녀들한테 사주겠다고 한 힐리스 운동화를 사기에도 부족했을 돈이다. 당시 한진중공업은 노조의 파업과 관련해 조합원 180명에게 통신문을 보내 150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를 하겠다고 압박해왔다.
김지도는 노조에 대한 손배가압류야말로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 모두를 파괴하는 악랄한 제도라고 했다. 김지도는 “이전에는 파업하면 구속하고 해고했지만, 이제는 안 시켜요. 왜냐하면 손배가압류라는 더 살인적인 무기들이 있으니까”라며 “가족이 다 풍비박산 나고, 애들 학원비, 우유값 다 끊어야 하지, 애들은 중고 옷 사 입어야 되고. 근데 그렇게 평생 해도 못 갚는 거죠”라고 말했다.
김주익이 죽고 2주도 되지 않아 그의 죽음을 슬퍼하던 곽재규도 크레인 옆 도크에서 투신했다. 9년 뒤 최강서 한진중공업지회 조직차장도 158억원 손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손배가압류라는 무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 지난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를 외치며 파업을 했던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하청 노동자들에겐 470억원이란 손해배상 소송이 닥쳤다.
“대우조선에서 일한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가 이야기를 해도 대우조선은 자기들 일이 아니라고 그냥 뒷짐 지고 있잖아요. 그 책임 회피를 합법적으로 인정을 해주는 이런 제도는 정말 잘못됐다고 보거든요. 그래 놓고 손배가압류를 무기로 하고…. 이런 식이라면 노동자들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뿐더러 평생을 정말 그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요. 지긋지긋한 하청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구조 없애고 원청을 책임에 놓아야 한다, 이건 상식이잖아요.”
무분별한 손배가압류를 제한하고 하청 노동자의 교섭권을 확대하는 노란봉투법은 국회 본회의에 회부됐지만 여야가 상정을 미루며 통과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김지도는 “노란봉투법은 이미 발생부터 시민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거잖아요. 이걸 어떻게 다듬어서 정착시킬 것인지만 논의하면 될 것 같은데, 사회적 합의니 여야 합의니 하고 있다”며 “노동자 문제에 관련된 어떤 조그마한 법안도 허용되지 않는 건 어쨌든 다 기업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걸 보여주잖아요. 이 사회가 누구 중심으로 흘러가는지”라고 말했다.
“저는 그 동료들의 죽음들이 제 자립을 규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저도 사실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고. 근데 그때마다 그냥 그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의 죄책감, 약속 이런 것들 때문에….”
김지도의 37년 해고 노동자 생활은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그들이 살고 싶다던 세상을 만들겠다는 약속으로 이어져왔다. 그래서 김지도는 더는 노동자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건설노동자 양회동씨, 택시노동자 방영환씨가 분신했다. 이 무거운 죽음들에 꿈쩍도 하지 않는 정부의 모습이 새삼 잔인하게 느껴졌다.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두산중공업 배달호의 유서와 지역을 건너뛴 한진중공업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 민주당사에서 농성하던 조수원과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김주익이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끊는 나라.”
김지도가 20년 전 김주익 추도사에서 읊은 이 문장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20년이 지난 지금을 김지도는 “더 악랄해진 사회”로 평가했다. 김지도는 “노동자와 시민사회는 정말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2011년 크레인에서 내려왔던 것도 연대의 힘이었고, 노란봉투법도 시민들이 만든 법이잖아요”라며 “하지만 정치권하고 기업인들은요, 우리가 발전한 만큼 더 비열해지고 악랄해졌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그래도 이런 식의 통제 방식이 오래갈 거라고 보진 않아요. 저는 노동자들이 버텼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고든, 자의든… 자연사 말고는 어떤 죽음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2018년 암 수술을 받고 치료를 이어온 김지도는 2020년 복직 투쟁 중 암이 재발해 재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수술 후유증 치료에 집중하고 있다. 4개 넘는 진료과에 다닌다는 그는 “내 몸에 잘해주려고 하는데, 안 해본 사람이라 방법을 모르겠다”며 웃었다.
“(복직 뒤 둘러본) 현장은 여전히 그냥 녹슨 채로 남아 있는데, 사람이 없는 그런 쓸쓸함들이 있었어요. 한번씩 그런 상상을 해요. 그 현장에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일하고, 그냥 같이 지나가면 씩 웃고, 그럴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근데 그 사람들은 없고, 저는 늙고… 그렇습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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