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스며든 ‘MZ컬렉터’…“첫 투자는 한 달치 월급만”

유승목 기자 2023. 10. 1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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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로만 접근? 컬렉팅 묘미 잃어
프리즈 서울에서 전시되는 김환기 작품 지난달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프리즈 서울을 찾은 젊은 여성들이 김환기 작가의 무제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뉴시스

#1. 지난달 글로벌 미술 ‘큰 손’들의 시선이 쏠렸던 ‘프리즈 서울’에선 2030 젊은 미술 컬렉터들이 유독 돋보였다. 개막 첫날 VIP 프리뷰를 관람한 이들은 인근 청담동, 신사동에 위치한 옥션·갤러리들이 연 디너파티를 찾아 샴페인을 즐기며 큐레이터, 작가들과 교류했다. “관심 있는 작품이 걸린 근처 갤러리로 가보자”며 늦은 밤까지 미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이들은 본 한 갤러리스트는 “‘영리치’들이 미술시장에 들어오니 서울도 뉴욕이나 파리 같은 분위기가 난다”고 말했다.

#2. 국내 주요 아트페어인 아트부산은 다음달 디자인과 현대미술을 섞은 신개념 아트페어 ‘디파인 서울’(DEFINE SEOUL)을 연다. 영국 런던, 이탈리아 밀라노 같은 해외로도 진출을 노리는 이들이 첫 상륙지로 고른 곳은 성수동. 요즘 2030세대로 붐비는 최고 핫플레이스로, 트렌드에 민감하고 예술적 감성도 충분한 젊은세대를 겨냥한 것이다. 디파인 서울 총괄 디렉터를 맡은 양태오 디자이너는 “한국에 젊은 미술 컬렉터들이 많아졌고 이들로 인해 작품을 소비하는 방식도 다양하게 바뀌고 있다”고 했다.

한국 미술시장이 젊어졌다.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가 미술에 눈을 돌리면서다. 요즘 ‘핫’한 현대미술 작가 전시엔 이들 사이에서 ‘광클’(표를 사기 위해 빠르게 클릭) 경쟁이 일어나는 건 예사다. 한적한 미술관람 문화에 익숙하던 4050세대는 “미술관을 예약하고 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작가와 전시기획자들은 작품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이들을 보고선 미술 향유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며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젊은층의 미술시장 침입은 비단 관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MZ 컬렉터’라는 이름으로 미술품 투자시장도 다시 그리고 있다. 수억에서 수 십억 원에 달하는 걸작을 사는 ‘큰 손’은 아니지만, 수백만에서 수천만 원의 눈여겨볼 작품을 사들이며 젊은 작가를 키우는 ‘작은 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키아프전경1 지난달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키아프 서울’ 전경. 키아프 제공

국내 MZ 컬렉터의 출발점은 ‘아트 인플루언서’가 된 글로벌 스타 방탄소년단(BTS) RM이다. 2018년 해외 투어 중 우연히 미술관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알려진 그는 금세 ‘영 리치 컬렉터’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전문가들도 놀랄 만한 수준의 미술에 대한 이해도를 보여주는 RM은 국내외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14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장욱진의 회고전에도 RM이 가진 6점의 그림이 출품될 정도다. 이번 프리즈에서도 RM이 발도장을 찍었단 소식은 한국 미술계의 오랜 아이콘인 ‘이건희 컬렉션’의 주역인 홍라희 전 리움 미술관장 만큼 높은 관심을 받았다.

주식, 부동산, 코인에 이어 새로운 투자처를 찾던 MZ세대가 RM 같은 아트 인플루언서의 영향을 받아 2021년부터 미술품 거래 시장에도 뛰어든 것이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미술관에 가야만 작품을 볼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요즘엔 누구나 손쉽게 작품을 볼 수 있단 점에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면서 “미술품을 사려면 돈과 함께 안목이나 취향, 이해가 있어야 하는 만큼 일종의 플렉스(Flex·자기과시)의 수단으로 명품 대신 미술품을 택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국내 미술 지형도도 이에 맞춰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인사동과 평창동, 삼청동 등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미술 클러스터가 강남 한남동과 청담동으로 옮겨가는 분위기다. 영국 유명 화랑인 화이트큐브가 지난달 5일 문을 열었고, 페이스, 타데우스 로팍, 탕컨템퍼러리아트 등 일류 해외 화랑들도 강남에 둥지를 틀었다. 원앤제이갤러리도 청담동으로 이전해 재개관전을 열고 있다. 명품숍이 많은 강남에서 활동하며 구매력이 강한 젊은 세대를 공략하기 위한 것이다. 유승희 코리아나 미술관장은 “20년 전 개관할 때와 달리 지금은 주변에 수많은 규모가 큰 화랑, 미술관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글로벌 경매사 크리스티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구매 고객 중 31%가 신규 고객인데, 이 중 38%가 30대 이하 연령층이었다. 라이벌인 필립스는 최근 1차 시장과 2차 시장을 나누는 갤러리와의 불문율을 깨고 작가와 구매자를 직접 연결하는 플랫폼인 ‘드롭샵’(Dropshop)을 선보였는데, 이는 젊은 컬렉터들이 갤러리를 거쳐 작품을 거래하는 절차 대신 SNS를 통해 관심 가는 작품의 정보를 얻고 자유롭게 구입하려는 특성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카텔란전시 올해 상반기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에서 젊은 여성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리움에 따르면 전시 관람객 2명 중 1명이 2030일 정도로 젊은 미술관람객들이 몰리면서 리움 개관 후 가장 많은 25만 명의 관람객 기록을 세웠다. 리움 제공

MZ 컬렉터들은 이른바 ‘레드칩’으로 불리는 젊은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떠받치고 있다. 구매력이 낮다 보니 ‘억’ 소리 나는 작품에 접근할 순 없지만, 자신의 취향과 맞고 관심이 가는 작가들의 작품을 적극 찾아내 소장하고 되파는 것이다. 1988년생인 김선우 작가가 대표적이다. 날 수 있었지만 천적이 없는 환경으로 게을러진 탓에 날기를 포기하고 멸종하게 된 ‘도도새’를 주제로 한 그의 그림에 스스로를 투영한 MZ 컬렉터들이 열광하고 있다. 손이천 케이옥션 수석경매사는 “4050세대가 요즘 MZ세대일 당시 유행했던 게 팝아트 요소가 있는 작품이었다면 최근엔 귀여운 감성의 작품들이 2030의 취향”이라면서 “우국원이나 김선우 같은 요즘 세대가 공감할 만한 개념에 귀엽게, 또는 독특하게 표현해내는 작품이 인기”라고 했다.

미술계는 젊은 컬렉터들이 달구는 시장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동시에 우려의 목소리도 낸다. 미술품을 지나치게 투자 관점으로 접근하거나, 분위기에 휩슬려 ‘패닉바잉’하는 등의 역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작품 보는 안목이 다소 부족하고 작품 가격이 결정되는 로직에 무신경한 점도 문제란 지적이다. 미술작품과 작가 이력을 알려주는 디지털 아트 플랫폼 ‘아티팩츠’를 선보인 박원재 원앤제이갤러리 대표는 “작가의 경력은 작품의 이력서나 마찬가지다. 어떤 기관이 협업해왔고, 누가 소장을 했는지만 살펴 보더라도 작품 가격에 대한 감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다양한 전시를 접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케이트리손이천

젊은 ‘초보 컬렉터’의 약점은 작품과 시장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술계 전문가들이 “많은 미술 작품을 즐기고, 더 많은 경험을 쌓으라”고 조언하는 이유다. 손이천 케이옥션 수석 경매사와 예술 및 지적재산권 전문 변호사로 최근 ‘아트 컬렉팅: 감상에서 소장으로, 소장을 넘어 투자로’(디자인하우스)를 쓴 저자인 케이트 리 법무법인(유) 율촌 변호사를 통해 현실적인 미술 투자법을 소개한다.

케이트 리=소셜미디어의 발달로 MZ세대는 언제든 원하는 작품을 보고 소통할 수 있어 예술에 대한 관심은 투자로 이어지고 있다. 당연히 좋아하는 작품을 판매할 때 경제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작품을 투자 대상으로만 보면 가격의 등락에만 집중하게 돼 컬렉팅의 묘미를 잃게 될 수 있다.

손이천=미술시장도 다른 자산시장처럼 투자측면에서 리스크가 큰 건 마찬가지다. 다만 미술 작품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사는 게 아니다. 집에 예쁜 작품을 걸어놓고 싶어 접근하는 게 컬렉션의 출발이다. 심미적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기에 미술 본연의 가치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젊은 컬렉터의 특성은?

케이트 리=동시대미술 중심의 신진 작가들 작품이 이들 투자의 대부분을 이룬다. 상대적으로 가격대가 낮으면서도 새로운 시도에 과감한 것으로, 신진작가들의 작품과 MZ컬렉터의 낯선 것에 대한 포용력과 모험적인 성향이 잘 어우러지고 있다. 세계 최대 아트페어 주관사인 아트 바젤(Art Basel)과 글로벌 금융기업 UBS의 ‘아트 마켓 보고서 2022(The Art Market 2022)’에 따르면 젊은 컬렉터들의 작품 보유기간은 평균 3년 정도로 기존 10년 이상었던 장기투자에 비해 기간이 현저히 짧아지고 있고, 온라인을 통한 예술작품 구매도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손이천=미술품 경매시장에서도 MZ 컬렉터들이 보인다. 경매장에 와서 낙찰 받는 모습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경우도 있는데, 예전이면 상상도 못했던 풍경이다. 다만 투자 경험이 적고, 기존 ‘큰 손’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미술시장 특성 상 유명 작가들의 유명 작품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케이옥션션 지난달 열린 서울 강남구 케이옥션 전시 프리뷰에서 젊은 여성 미술 애호가들이 최근 미술시장에서 주목받는 우국원 작가의 ‘Third Time Lucky’(사진 가운데)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케이옥션 제공

◇미술 안목, 책이 아닌 현장에서 길러야

케이트 리=반드시 사전에 공부하고 자기 취향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가능한 많은 작품을 보길 권한다. 많은 작품을 대하다 보면 장르, 시대, 사조, 작가, 매체, 표현법에 이르기까지 관심과 선호가 생기고 그에 맞춰 컬렉션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손이천=미술은 결국 시각예술인 만큼 전시에서 안목을 키우고, 그 안목을 얼마나 가다듬느냐가 중요한데 이는 텍스트를 읽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작가는 왜 그렸을까 질문을 던지고 작가 노트를 보거나 작품을 관찰하고 이해하면서 즐기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작은 소품이라도 사볼까 하며 자연스럽게 소장의 길로 들어선다.

◇작품 가격 천차만별, 초보라면 한 달 치 월급이 적당

케이트 리=지난 프리즈 서울, 키아프 서울에선 MZ세대들이 대부분 1000만 원 이하의 작품을 구매했다고 들었다. 1차 마켓에서 가격을 비교하고, 추후 2차 마켓에서 재판매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게 좋다. 모든 투자에는 실패의 위험이 따르고 성공적 투자에는 연구가 뒷받침돼야 하듯, 수익을 얻으려면 사전에 많은 것을 공부해야 한다. 작품 소장이력과 진위 여부, 인지도, 유동성, 여러 수수료와 비용, 세금 등의 문제를 생각해 투자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손이천=초보 컬렉터라면 일반적으로 일반 직장인의 한 달 치 월급 수준인 300만 원 안팎에서 구매해보는 게 타격이 적다. 미술 작품 구매를 위해 절대 빚을 내선 안 된다.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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