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기업 오너 일가의 묘소에 무너진 기업 윤리
(시사저널=김경수 기자)
10월10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하갈동의 한 야산.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선대회장의 선영이 위치한 곳이다. 묘지로 향하는 출입문 바로 옆에는 관리사무소 같은 단독주택이 별장처럼 홀로 세워져 있다. 입구를 지나자 넓은 규모의 정리된 밭이 보인다. 이 밭 건너에 있는 조 선대회장의 묘지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정기적으로 관리해 온 듯 깔끔하게 정리된 게 한눈에 보였다.
이 선영이 수년째 불법 논란에 시달리고 있어 배경이 주목된다. 일반 임야에 산림을 훼손하고 묘지를 불법 조성한 것은 기본이다. 한진그룹 측은 관할 지자체인 용인시와 기흥구청의 잇따른 시정명령에도 이행강제금을 계속 물면서 버티는 것으로 시사저널 취재 결과 드러났다.
도대체 이곳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곗바늘을 2019년 4월8일로 되돌려보자. 조양호 선대회장은 이날 미국 LA에서 치료받다 지병이 갑자기 심해지면서 타계했다. 한진그룹은 용인시 기흥구 하갈동 산152번지 일원에 조 선대회장의 선영을 마련했다. 대한항공을 비롯한 한진 오너가들이 부지를 나눠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조중훈 창업주의 선영 역시 인근 100m 내에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이곳이 묘지를 조성할 수 없는 장소라는 점이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에 따르면 묘지를 설치한 자는 해당 묘지를 관할하는 지자체에게 신고해야 한다. 2002년 타계한 조중훈 창업주의 선영을 조성할 때는 이 절차를 거쳤다. 그 때문에 선영의 용도 역시 '임야'가 아니라 '묘'로 표기돼 있다.
일반 임야 훼손…이행강제금 내며 버텨
하지만 조 선대회장의 경우 이런 신고나 부지의 용도 변경 절차 없이 임야에 묘지를 조성했다. 뒤늦게 불법 사실을 파악한 용인시와 기흥구청이 2019년 9월부터 행정절차 이행이나 개선명령 등을 여러 차례 제기했음에도 한진그룹은 꿈쩍도 안 했다. 참다못한 행정 당국은 2021년 3월 한진그룹을 경찰에 고발했다. 조 전 회장의 묘지는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과 장사법, 산지관리법 등을 위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위반 내용을 보면, 장사법 제14조(사설 묘지의 설치 등)에 따라 묘지를 조성하기 위해선 용인시에 개발 행위에 대한 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아 토지 형질을 임야에서 묘지로 변경해야 한다. 한진그룹은 이를 지키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진그룹 측은 조 선대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인해 법적 측면을 살피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그룹 관계자는 "갑작스러운 타계로 장례 절차가 급작스럽게 이뤄지면서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이후 법령을 준수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회사의 존폐를 다투는 위기가 발생하면서 불가피하게 지연됐다"면서 "최근 법령 위반 사항 해소를 위한 복구설계서를 지자체에 제출하는 등 제반 절차를 진행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사저널이 현장에서 만난 지자체 관계자들의 설명은 달랐다. 조 선대회장의 묘는 기본적인 신고조차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법에 규정된 설치 규정 역시 지키지 않았다. 현행법상 묘지 면적은 1인당 30㎡로 제한된다. 조 선대회장의 묘는 그 3배가 넘는 약 108㎡에 달한다. 설치 기준도 위반했다. 사설 묘지의 설치 기준(제15조 관련)에 따르면 20호 이상의 인가 밀집 지역, 학교, 그 밖에 공중이 수시로 집합하는 시설 또는 장소로부터 300m 이상 떨어져야 한다. 하지만 조 선대회장의 묘는 물류센터, 제조공장 등 다수가 이동하는 공중 집합시설과 약 80m, 230m 안에 조성됐다. "갑작스러운 별세로 서둘러 묘지를 조성하다 보니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한진그룹 측의 답변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진그룹 "갑작스런 유고로 인해 급하게…"
2021년 3월 불법 묘지 조성 사실을 적발한 용인시는 행정절차를 이행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한진그룹 계열사 대한항공을 경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한진그룹은 1000만원이 넘는 벌금만 낸 채 2년이 넘도록 묘를 이전하지 않고 있다. 현재도 한진그룹은 지자체가 부과한 이행강제금만 내면서 버티고 있다. 불법으로 조성된 묘를 이장하지 않으면 1년에 최대 두 번, 각 500만원의 이행강제금이 부과된다.
용인시는 최근 묘지 이전 명령을 다시 한진그룹 측에 내리고, 이장하지 않으면 이행강제금을 또다시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예고 처분 또한 계속할 계획이다. 용인시의 한 관계자는 "자진해서 묘지를 이장하도록 그동안 여러 차례 독려했지만, 한진그룹 측은 아무런 반응 없이 행정절차를 이행하지 않으며 불법행위를 유지하고 있다"며 "이달 중으로 또 한 번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계 10위권인 한진그룹 일가에 연 1000만원의 이행강제금은 표시도 나지 않는 수준이어서 뒷말이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도 비슷한 지적이다. 이행강제금 액수가 적어 대기업에는 전혀 부담이 되지 않다 보니 시정명령 조치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대기업의 경우 이를 악용하기도 한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지자체 등 행정기관이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창률 단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포르투갈·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는 소득 수준에 따라 범칙금의 액수를 부과하는 '소득 차등 범칙금제'를 도입하고 있다"면서 "구제명령의 조속한 이행을 끌어내는 본래의 취지에 맞도록 국내에도 이 법을 도입해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 교수는 이어 "소득 차등 범칙금 제도는 법규를 철저히 지키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생겨났다"면서 "같은 액수의 범칙금을 물리면 일반 시민과 달리 부자들에게는 그다지 제재 효과가 없다는 점이 고려됐다"고 덧붙였다.
토지 소유주 대한항공을 둘러싼 배임 논란도
조양호 선대회장의 선영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 이뿐만이 아니다. 조 선대회장의 선영은 대한항공 측에 생각지도 않은 피해를 줬다. 요컨대 조 선대회장 일가는 하갈동 묘지를 조성하면서 약 1281㎡의 산림을 훼손했다. 뒤늦게 불법 묘지 조성 사실을 고발당한 대한항공은 1000만원이 넘는 벌금을 부과받았다. 용인시가 조 선대회장 일가가 아니라 대한항공을 고발한 이유는 선영이 위치한 토지 소유주가 대한항공이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룹 안팎에서는 회장 등 오너 일가에 선영 토지를 무상 제공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심지어 오너 일가의 개인적인 일에 대한항공 직원들이 동원되면서 배임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대한항공 주주들로부터 소송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조 선대회장의 묘가 불법 조성된 토지는 회사 재산이다. 선대회장이라 할지라도 개인이 무단으로 사용하면 회사와 주주 등의 재산상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크다"면서 "묘지 조성을 위한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가 나오는 만큼 배임에 대한 의혹을 떳떳하게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도 한진그룹 측은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고 해명했다. 그룹 관계자는 "오너 일가 선영과 관련해 회사에 이행강제금 처분이 내려지지 않았으며, 어떠한 과태료도 회사가 대납한 바 없다"면서 "사용 계약 역시 적법한 권원에 의해 설치됐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회사는 지속 가능한 사회적 책임 이행과 경영을 위한 지배구조 체계 강화를 핵심가치로 ESG경영을 펼치고 있다"며 "현재 법령 위반 사항 해소를 위한 복구설계서 제출 등 제반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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