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욱 | 대 이어 고수해온 불판과 낙지의 남다른 조화[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12)

2023. 10. 17.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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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서린낙지’
서린낙지를 찾은 북오션 박영욱 대표 / 박영욱 제공


출판 기획자와 출판사 대표, 에이전시 대표로 살아온 출판계 28년을 정리한 책 <내일도, 처음처럼> 출판기념회를 막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주간경향 편집장의 ‘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 원고 청탁을 받고 ‘내 인생 맛집은 어디일까’ 장고를 거듭해온 터였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맛집이 있었다. 내 인생의 달콤쌉쌀한 희로애락의 사연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린낙지’다. 바로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켰다.

서린낙지는 너무 유명해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진짜 진국 같은 맛집이지만 나와의 인연은 이 글 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깊고도 넓다. 내가 서린낙지를 처음 만난 시기는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늦게 군대를 장교로 전역하고 서른에 출판계에 뛰어들었다. 당시 나는 딱히 출판계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편집 일도 반복적이라 출판이 평생 갈 길일까 고민하던 때이기도 했다. 우연히 ‘전철우’라고 귀순한 한 방송인의 출판기념회가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마침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던 친구가 초대해 난생처음 출판기념회라는 걸 참가해봤다. 뒤풀이가 이어졌다. 2차는 피맛골 열차집에서 했다. 지금은 이전했지만, 당시 열차집은 피맛골 초입에 있었다. 노릇노릇 구워 고소한 빈대떡과 막걸리가 일품이었다. 피맛골은 ‘마차를 피하는 골목’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중의 애환이 서린 문화유산이었다. 청계천 재개발과 더불어 사라져 못내 아쉽다.

열차집의 강력한 인상에 이끌려 며칠 뒤 광화문 교보문고에 시장조사를 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피맛골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밤에는 안 보이던 생선구이 백반집들이 즐비했다. 주인장들이 입구에 서서 참치, 고등어, 갈치를 굽고 있는 모습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른다. 특히 무더운 여름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생선을 굽고 있는 모습은 삶의 치열함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그 모습에 반해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생선구이를 즐겨먹곤 했다. 백반집과 생선구이집이 모여 있던 그 골목길 끝에 서린낙지가 있었다. 서린낙지와의 인연을 말하려다 보니 서론이 길어졌다.

서린낙지의 첫인상은 이질적이어서 생경한 느낌이었다. 피맛골 가게들이 좀 노후한 한옥이라면, 서린낙지만 양옥집 1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메뉴도 생선 일색이던 이웃 식당들과는 달랐다. 낙지볶음 요리는 가격 면에서도 좀더 비쌌다. 그때 받은 서린낙지에 대한 인상은 ‘출판사 박봉으로 다니기엔 가격이 좀 부담스럽다’였다. 맛도 너무 매워,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렇게 서린낙지는 내게 그냥저냥 좀 색다른 음식점 정도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러다 피맛골이 도시정비사업으로 사라지면서, 서린낙지는 2009년 서울 종로구의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으로 이전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새 월급쟁이에서 ㈜한성출판기획과 북오션을 창업한 오너가 됐다. 자연스럽게 기자들이나 작가들, 직원들과 서린낙지를 자주 찾았다. 종로 쪽에서 약속이 많았는데, 매번 장소를 물색하기도 번거로웠지만 한 달에 한두 번 먹는 서린낙지의 매콤함에 푹 빠져 나도 모르게 저절로 그쪽으로 발길이 향하게 됐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니 점심 약속이 있을 때면 으레 자동으로 찾는 단골집이 되고 말았다.

다녀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서린낙지의 독특한 맛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서린낙지를 처음 먹어보면 선뜻 이것이 낙지볶음인가 싶다. 서린낙지니까 당연히 낙지볶음을 떠올리겠지만 막상 불판에 올려진 음식을 보면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한다. 일단 주문을 하면 포일로 감싼 일명 부르스터(휴대용 버너) 불판 위에 콩나물, 김치, 베이컨, 소시지, 채소, 감자가 올려져 나온다. 그 불판에 매운 낙지볶음 한 접시를 붓는다. 그리고 좀 끓어오를 때까지 기다리거나 익혀서 나온 낙지를 먼저 먹는다. 대다수 손님이 참지 못하고 소주 한 잔을 시킨다. 목을 축이며 기다리다 보면 사이드 반찬으로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투박한 단무지와 따뜻한 콩나물국, 동치미, 겨자 소스가 나온다. 이 반찬은 먹다 보면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 불판을 골고루 섞어주면 낙지 양념이 스며들어 먹기 좋게 익어간다. 베이컨이 익으면 바로 그 순간이 온다. 매운 낙지와 베이컨을 쌈 싸듯 싸서 먹는 순간 말이다. 어디에서도 맛보기 어려운 음식 조합의 탄생이다. 혹시 아직 안 가본 분이라면 색다른 미식 경험을 하게 되리라고 자신 있게 추천한다. 평소 잘 안 먹는 소시지를 겨자 소스에 찍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서린낙지의 매콤함은 처음에는 모르나 중간쯤 먹다 보면 혀끝이 아릴 만큼 매운 풍미가 올라온다. 혀의 뜨거움을 식히라고, 단무지나 동치미 국물, 콩나물국으로 쓰린 속을 달래라고 사이드 반찬을 주는구나,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낙지 맛이 덜 매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나이가 제법 들어 이젠 매운 걸 못 먹어야 정상인데, 이상한 일 아닌가.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덜 맵도록 무슨 조치를 한 건 아니란다. 매운맛에 적응이 됐구나!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래도 옛날에 느꼈던 그 매운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양념장을 추가로 달라고 해서 넣어 먹곤 한다. 아삭거리는 식감이 좋아 추가로 콩나물을 몇 번 더 시켜먹고, 매운 낙지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면 땀과 함께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듯하다.

서린낙지는 1959년 문을 열었다. 현재 박범준 대표의 할머니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2대인 아버지대에 현재의 음식 구성을 완성했고, 3대째 가업을 잇는 중이다. 3대째 이어가는 노포 음식점 찾기가 여간해선 쉽지 않은데 뚝심이 느껴진다. 변함없는 맛도 그렇지만 조금만 장사가 되면 프랜차이즈 가맹 사업을 벌이는 게 추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아닌가. 그런 점에서 서린낙지가 대전이나 군산의 모 빵집처럼 프랜차이즈를 거부하고 본래의 맛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서린낙지는 광화문에 가야만 그 맛을 느낄 수 있다. 내 사무실이 있는 마포 어디에도 없다. 무수한 낙지집이 있지만 비슷할지언정 서린낙지만의 독특한 맛을 따라갈 수는 없다. 단지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매년 1월 시무식 후에는 직원들과 서린낙지에서 점심을 함께한다. 코로나19로 몇 해 건너뛰다 올해 다시 식사를 했다. 매운 낙지를 먹으면서 지난해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한 해가 무탈하길 빌었다. 올해 시무식 때 보니 일하는 분들이 대거 바뀌었다. 내가 운영 중인 출판사인 ㈜북오션도 직원들이 비교적 오래 근무하는 편이지만, 서린낙지도 만만치 않았다. 20년여의 세월이 쌓이면서 단골 축에 끼었는지 아주머니들이 차츰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휴식시간에 무료함을 달래라고 책 선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에 장사 없다고, 이들도 나이가 들어 기력이 달리면서 최근 들어 세대교체가 많이 이뤄졌다고 한다.

6년 후면 북오션은 창업 30주년을 맞는다. 6년 뒤의 일이라 아주 먼일 같지만, 세월이 주마등처럼 금방 가는 걸 보면 그리 먼일도 아니다. 그때까지 서린낙지도, 나도 다 무탈하길 바란다.

필자는 다소 늦은 서른에 출판사에 들어왔다. ‘학사장교 전역과 국문과를 나온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문학의 자양분으로 1년 8개월 뒤에 출판 기획사인 한성출판기획을 창업해 1700여 명의 저자를 발굴했다. 그 뒤 번역 에이전시를 창업해 번역자 양성에 힘썼다. 문학 에이전시인 옵션에이전시를 운영했고, 편집디자인 회사인 P&P디자인을 창업하기도 했다. 이어 출판사 ㈜북오션과 깊은나무를 창업해 600종의 서적을 발간했다. 현재 출판사들 외에도 유튜브 채널 ‘쏠쏠TV’와 ‘쏠쏠라이프’를 운영 중이다.

박영욱 ‘북오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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