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연금권엔 왜 무관심한가요
유럽선 ‘성별 연금격차’ 개선…“출산크레딧 확대를”
올해 38세인 박모씨는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다. 그가 전업주부의 길을 택한 건 2014년 겨울. 열에 아홉은 남성 직원인 자동차 부품회사에 다녔던 그는 첫 아이 출산 3개월 후 복직했다. 친정 부모가 아기를 봐 주었지만, 곧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시절 그는 퇴근하면 부리나케 동네로 달려와 어린이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나 어린이집마다 대기자가 너무 많아 아기를 받아주는 곳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사표를 썼다.
그 뒤 9년이 흘렀다.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다. ‘남의 돈으로는 내 친구 선물조차 마음 편하게 해줄 수 없다.’ “정곡을 찔린 느낌이랄까. 두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해왔지만, 어쨌든 남(남편)의 돈을 받아 쓰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거든요.”
최근 그는 이대로 가사·돌봄 전담만 하다가는 나중에 국민연금조차 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연금 수급을 위해서는 보험료 납입기간이 10년 이상이어야 하는데, 박씨가 직장생활을 한 기간은 5년이었다. 국민연금 제도상 ‘전업주부’는 본인이 가입 의사를 표하지 않는 한 적용 대상에서 배제되는 ‘적용제외자’다. 국민연금이 애초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을 기초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결혼을 해서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일한 건데, 정부 제도마저 월급 따박따박 찍히는 사람에게 더 유리하네요. 제가 일을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둔 것도 아니었는데….”
정부의 연금개혁안 발표를 앞두고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쟁점은 미래세대의 부담 완화가 먼저냐, 현세대의 소득대체율 인상이 먼저냐, 보험료 인상은 어느 정도가 적절하냐 등에 집중돼 있다. ‘여성의 관점’으로 연금개혁 과제를 논하려는 움직임은 아직까지 미약한 수준이다.
유럽에선 2010년대부터 ‘성별 연금 격차(gender pension gap)’라는 개념을 통해 공적연금 제도가 얼마나 성차별적인지를 가늠해왔고, 연금개혁 과정에서 이를 완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역시 각국의 성별 연금 격차 통계를 발표하고 있다(표 1). 한국은 성별 연금 격차가 심각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공식 지표를 만들어 관리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여성의 연금권’ 현실
여성의 노후소득이 남성보다 적은 것은 당연한가. 한국의 공적연금제도는 ‘여성의 연금권’을 얼마나 보장해주고 있을까. 한국의 연금개혁 논의에서 아직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질문들이다.
먼저 여성이 국민연금제도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자. 국민연금 보험료를 20년 이상 낸 경우 받는 연금을 ‘완전노령연금’이라고 한다. 20년은 가입해야 노후에 연금다운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으로 완전노령연금을 받는 남성 노인은 72만8만900명인 반면 여성 노인은 12만5000명이었다. 약 6배 차이다(표 2).
나아가 수급자의 규모도 남녀 차이가 크다. 지난해 국민연금공단의 통계에 따르면, 남성 노인은 10명 중 6.5명이 국민연금을 받고 있는 반면, 여성 노인의 경우엔 10명 중 3.7명만 국민연금을 받고 있다.
국민연금의 남녀 격차가 처음부터 이렇게 크진 않았다. 국민연금의 연령대별 남녀 가입률을 보면, 20대 후반까지는 여성의 가입률(69.3%)이 남성(54.1%)보다 높다가 30대 후반에 이르면 10%p 떨어진다. 그사이 남성의 가입률은 여성을 추월해 40대에 87.6%를 찍은 뒤 줄곧 80%선을 유지한다. 30대에 꺾인 여성의 국민연금 가입률은 40대에 잠깐 오르지만, 은퇴 때까지 20대 때의 비율에 이르지 못한다(김태일, 신영민 <OECD국가 비교를 통한 국민연금 보장성 강화 방안>).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는 한국 여성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돼 있는 셈이다.
연금액을 좌우하는 가입기간·임금의 남녀 격차를 보면 허약한 여성 연금권 현실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9년 전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던 박씨는 최근 다시 경제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런데 그가 재취업 등으로 수급권을 따 내더라도(가입기간 10년 완성), 경력단절이 없었던 남편에 비하면 총가입기간은 짧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등의 불안정 일자리에 종사할 가능성이 커서 재취업 이후에도 보험료 납부는 종종 끊길 수 있다. 수많은 여성이 국민연금 납부와 관련해 이런 경로를 밟는다. <표 3>을 보면, 국민연금 가입기간은 30~34세까지 여성이 남성을 앞서지만(여성 73.1개월 남성 66.6개월) 이후 남성이 여성을 추월해 55~59세에 이르면 남성 236.2개월, 여성 150.1개월이 된다. 최종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가입기간이 약 7년 이상 길다. 국민연금액은 가입기간에 비례하기 때문에 가입기간 격차는 곧 연금액 격차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다. 국민연금은 청·장년 시기 소득에 비례해 연금액을 지급한다. 잘 알려져 있듯,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26년째 OECD 꼴찌다. 지난해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31.2%. 남성이 100만원을 버는 동안 여성은 68만8000원을 벌었다는 뜻이다(남성 전일제근로자 중위소득과 여성 전일제근로자 중위소득을 비교한 지표). 현재 국민연금은 일하던 시기의 월소득 42.5%(40년 납부 기준)를 월연금액으로 지급한다. ‘월소득(임금)’의 격차 역시 연금 격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첫 아이 연금크레딧 왜 못 하나
한마디로 연금의 성차별적 속성은 일차적으로는 노동시장에서의 남녀 격차(여성은 출산·육아·돌봄으로 경력이 단절될 가능성이 높고 노동시장에 있더라도 불안정한 지위를 통해 남성보다 저임금을 받는 현실)가 초래한 ‘결과’다.
그런데 연금 격차에 ‘결과’로서의 속성만 있는 건 아니다. 노동시장에서의 남녀 격차가 노후의 공적 연금액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 사회가 연금제도를 통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느냐를 따져볼 수 있다. 한국사회는 이런 제도적 노력마저 부족한 형편이다.
성평등에 무관심한 국민연금 현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가 ‘부실한 출산크레딧 제도’다. 크레딧이란 실제로는 보험료 납부를 하지 않았지만, 일정기간 납부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로, 현재 국민연금의 출산크레딧 제도는 둘째 자녀부터 적용된다. 둘째 자녀를 낳으면(입양하면) 가입기간을 12개월 더해주고, 셋째 자녀부터는 자녀 1명당 18개월씩 추가해 최대 50개월까지 가입기간을 인정해 주는 방식이다.
현 수준의 출산크레딧 제도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출산크레딧이 있는 국가 중 첫 아이를 인정 안 하는 곳은 대한민국이 유일”(김태일 고려대 교수)할 뿐 아니라 인정기간 역시 매우 짧기 때문이다. 대개의 연금 선진국에선 출산뿐 아니라 육아·돌봄크레딧을 운영 중이고, 그 기간은 자녀당 2~4년에 이른다(표 4).
크레딧은 단순히 일정기간의 ‘보험료 혜택’만이 아니다. 석재은 한림대 교수의 논문 ‘한국의 연금개혁과 젠더레짐의 궤적’에 따르면, 독일은 1자녀당 3년의 양육크레딧을 인정하는데 연금 수급자격을 얻기 위한 보험료 납입기간이 5년이기 때문에 자녀를 2명 양육하면 연급수급권을 획득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출산·육아크레딧을 두텁게 지원한다면 경력단절 때문에 수급권마저 위협받는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직장 가입자로서 5년간 국민연금보험료를 납부하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전업주부가 된 박씨를 예로 들어보자. 그에게 두 아이 출산·양육크레딧으로 ‘가입기간 5년’을 인정해준다면 그는 설사 재취업에 실패한다고 해도 국민연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가입기간 10년 충족). 수급권이 생겼으니 연금액을 키워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보험료를 납부하는 노력도 이끌어낼 수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출산크레딧을 첫째 아이부터 적용하고, 양육 크레딧도 인정해 혜택기간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수년째 제기돼 왔지만, 실제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진 않고 있다.
■ 여성에겐 ‘자기만의 연금’이 필요하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유족연금으로 생활했어요. 그런데 원래 아버지가 받아야 할 금액의 50~60% 수준밖에 안 되더라고요. 어머니가 평생 해온 양육과 가사에 대해 나라가 ‘페널티’를 주는 거 아닌가 싶더군요.”
서울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 두 자녀를 키우는 안모씨(56)는 자신의 어머니 사례를 떠올리며, 전업주부가 된 뒤 국민연금에 임의가입을 했다(의무 가입대상이 아닌 전업주부가 자발적으로 가입하는 것을 임의가입이라고 한다). 출산 전에 직장생활을 오래해 수급조건(가입기간 10년)을 채우긴 했지만, 충분한 연금을 누리기 위해 임의가입을 택한 것이다. 공인회계사였던 그는 “시중 연금상품을 살펴보다 국민연금이 가입자에게 가장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동안의 납입으로 아마 월 100만원은 넘게 받을 것 같다”고 했다.
여성의 연금권은 여성이 ‘자기만의 연금’, 더 나아가 ‘자기만의 충분한 연금’을 가질 권리를 말한다. 안씨의 어머니가 유족연금이라는 파생적 수급권(남편 연금에서 파생된 수급권)만을 갖고 있었다면 안씨는 개별수급권을 갖고 있고, 연금액을 키우기 위해 보험료를 붓고 있다. 자신의 연금권을 누리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공적연금이 성평등해지려면 더 많은 여성이 안씨처럼 ‘자기만의 충분한 연금’을 만들어가도록 크레딧 제도 등으로 유도해야 한다.
현재 한국 여성들의 ‘저조한 개별수급권’ 현실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노령연금(일반적으로 노후에 받는 국민연금) 수급자는 남성 331만4205명, 여성 199만8154명이었다. 반면 자기 명의의 연금이 아니라 유족연금을 받는 규모는 여성(84만9473명)이 남성(8만4164명)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연금 선진국들의 성별 연금 격차를 분석한 <성별 연금격차의 국가비교 연구>의 주(主)저자인 이다미 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국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성별 연금 격차(gender pension gap)’는 여성의 연금소득을 남성의 연금소득으로 나눠서 구하는데, 이 지표엔 수급권 자체가 없는 경우는 반영할 수 없다”면서 “크레딧 강화, 보험료 지원 등 여성의 개별수급권을 높이기 위한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고, 여성 수급권이 어느 정도 높아지면 그때부터 ‘성별 연금 격차’ 지표를 공식적으로 만들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한국의 연금제도가 ‘여성의 연금권’에 소홀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 2007년 연금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기초연금제도로 현재 하위 70%의 모든 노인은 약 32만원의 기초연금을 받고 있는데, 이 제도는 결과적으로 ‘여성 친화적’인 효과를 냈다. 석재은 한림대 교수는 “소득 하위 70%엔 남성 노인보다 여성 노인이 훨씬 많이 포진돼 있다. 월 30만원이 충분하진 않지만 그래도 여성 노인에게 연금 수급권을 부여했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면서 “국민연금 수급권 기회를 놓쳐버린 현 노인세대 여성들의 연금권은 기초연금 제도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충족하는 것을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하는 여성들이 가급적 국민연금 수급권을 포기하지 않도록 홍보부터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수완 강남대 교수는 “국민연금엔 소득 재분배 기능이 있어서(저소득층의 수익비가 고소층보다 높다는 의미), 저임금이라 해도 일단 국민연금 안으로 들어와 기여하면 혜택을 볼 수 있다”면서 “남편 명의의 가게에서 일하는 무급 가족종사자 등 비공식적으로 노동소득을 올리는 여성들은 지역가입자로 가입을 하는 것이, 노후소득 보장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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