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는 왜 섭식장애와 싸우게 됐나…다큐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시골에 내려가더라도 무주에는 안 살아."
"왜? 무주엔 엄마가 있는데."
"엄마가 있으니까 안 살아."
"너랑 나랑은 영원한 평행선이구나."
차례상을 사이에 놓고 밥을 먹던 엄마 상옥 씨와 딸 채영 씨가 조용히 옥신각신한다. 상옥 씨는 딸의 대답이 서운한 듯 먼 산을 바라본다.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깨고 상옥 씨가 딸에게 건넨 말은 "너 세수했어?".
언뜻 평범한 모녀 같지만, 두 사람에게는 꺼내 보이기 어려운 깊은 상처가 있다.
채영 씨는 10대 때부터 섭식장애를 앓았다. 2주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 않는 바람에 뇌 손상 직전까지 간 적도 있고, 어떨 때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먹고서 토하기도 했다.
엄마는 딸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대체 이런 증상을 보이는 이유가 뭔지 답답함도 커졌다. 상옥 씨는 섭식장애를 공부하고 채영 씨와 얘기도 해보며 원인을 찾아갔다.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이들 모녀가 섭식장애와 맞닥뜨린 지 10여 년이 흐른 때를 배경으로 한다. 두 사람의 인터뷰와 일상, 병상일지를 보여주면서 섭식장애의 원인에 다가가는 한편, 모녀 관계와 여성 문제를 탐구한다.
이 작품은 여성의 몸과 생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2018)로 호평받았던 김보람 감독의 신작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비프메세나상을, 베이징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언급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채영 씨가 상담사를 찾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지금까지도 이따금 찾아오는 섭식장애와 싸우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채영 씨는 식당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린다. 요리할 땐 왠지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한다.
시간이 날 땐 엄마가 있는 무주에 간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지만, 사실 이곳은 채영 씨에게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은 아니다.
그는 어릴 적을 돌아보면 누군가의 집에 맡겨진 기억이 대부분이라고 털어놓는다. 상옥 씨는 먹고살기 위해 온종일 일을 해야 했다. 딸과 함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었다.
상옥 씨가 무주의 한 대안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취직한 이후에는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채영 씨는 그때부터 상옥 씨가 모두의 엄마가 됐다고 떠올린다. 집안은 늘 학생들로 붐볐지만 어린 채영 씨는 고립감을 느꼈다.
지금 상옥 씨 집 책장은 섭식장애 관련 서적으로 빼곡하다. 상옥 씨는 딸이 호주로 훌쩍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그를 안고 한참 동안 "아프지 마"라는 말만 애틋하게 반복한다. 하지만 상옥 씨 역시 딸이 어린아이였을 때의 기억은 거의 없다고 고백한다.
그는 30대 시절의 자신을 "삶의 모든 것을 다 잃은 패잔병"이라고 묘사한다. 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 정식 일자리를 갖게 되자 그는 자신이 쓰임새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나 학생들을 돌보는 데 몰두하면 할수록 정작 딸인 채영 씨는 소외돼갔다.
모녀의 개인적 이야기는 어느새 사회 문제로 확장된다.
워킹맘이자 싱글맘,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였던 상옥 씨와 어쩌면 그로 인해 섭식장애를 안고 살게 된 채영 씨의 사연은 단순히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서다.
여성주의 관점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이 영화는 거식증과 폭식증에 대한 편견도 깬다. 상옥 씨는 "몸매에 신경 쓰느라 애가 저런 병에 걸렸다"는 비난을 받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섭식장애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자의 욕망으로 인해서만 발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상옥 씨의 어머니이자 채영 씨의 외할머니 역시 약 40년간 섭식장애를 앓았다. 상옥 씨는 엄마를 싫어했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병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깊은 연민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모녀 관계를 뛰어넘어, 동시대를 살았던 한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처지를 공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엄마가 음식을 먹고 토하던 때를 떠올리는 상옥 씨의 말이 더 안타깝게 들린다.
"엄마가 힘들 때면 길거리에 있는 나뭇가지로 목구멍을 쑤셔서 토해냈어요. 엄마는 왜 그렇게 토했을까…엄마가 살면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게 그거밖에 없어서였지 않았을까? 그것 말고는 자기가 뭔가를 어떻게 할 수 있었던 게 없었던 것 같아요."
10월 25일 개봉. 91분. 12세 이상 관람가.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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