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광장] 스마트폰과 책 사이에서
가을과 연관되는 말 중에 '등화가친(燈火可親)'이 있다. 가을밤에는 등불을 가까이하여 책을 읽기에 좋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굳이 가을밤이 아니더라도 침대맡에 독서등을 켜 놓고 책을 읽으면, 드러누워서 수많은 사람들과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사치를 누릴 수 있다. 내 영혼을 반짝거리게 하는 책들-이를테면 표현의 절묘함에 감탄하고 영감을 주는 시집, 삶의 고결함과 누추함을 동시에 일러주는 소설책, 척박한 머릿속으로 지혜의 샘물을 흘려주는 인문학책들을 읽다가 보면 고요한 밤이 행복해질 때가 있다.
1960-1970년대에 궁벽한 시골에서 유·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부모님이 책을 사주는 인문학적 환경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식민지와 전쟁 이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살아오면서 학교라고는 근처에도 못 가 보고 한글 해독도 힘든 부모님이 많았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 사정이다 보니 책이라고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받은 국정교과서가 전부였다. 나라의 살림이 궁핍하니 국민들의 영혼을 윤택하게 하는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당대의 군부정권도 그들의 권력을 유지·강화해 나가기 위한 이념에 주로 힘썼지, 미래를 담당할 세대에게 책으로 삶의 표면적을 부풀려 주고자 하는 의지와 철학이 없었던 듯했다.
글 쓰는 사람들 중에는 어린 시절부터 도서관을 드나들며 많은 책을 읽고 학창 시절 내내 문재(文才)를 드날렸다는 이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과 달리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지나온 나의 소년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열등감에 빠지곤 한다. 내가 도서관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인근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였다. 고등학교에도 제대로 된 도서관이 없었던 터라 임진왜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던 진주성 안의 시립도서관을 가끔 찾아가곤 했던 것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책을 제대로 읽겠다기보다는 정기고사 기간에 시험 준비한답시고 친구들과 몰려갔다가, 공부보다는 봄꽃과 강 건너 대밭에 마음이 팔려 싱숭생숭해지던 시절이었다. 학비 부담이 적은 국립대학을 찾아서 대전으로 오게 되고, 또 우여곡절 끝에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게 되면서부터 도서관을 제대로 이용하게 되었다. 교사로 근무하면서 오랫동안 학교도서관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기도 했다.
도서관이 영화에서는 서가의 틈을 사이에 두고 청춘남녀가 눈이 맞아 인연이 맺어지는 곳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애초에 나에겐 그런 낭만도 지적 호기심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깨알처럼 자잘한 활자들을 세로로 배치한 책이 많았는데, 성인이 될 때까지 나에게 도서관은 좀벌레 크기의 글자들이 세로로 줄을 맞추어 한국전쟁 이후와 군사정권 시절의 궁핍하고 케케묵은 정서를 전해 주는 곳이 되기도 했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취업 준비한다고 억지로 앉아 있어야 했을 때는 영혼에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책이 내 청춘을 갉아먹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도 도서관은 내 마음의 영토를 넓히고 기름지게 한 곳이었다.
요즈음 청소년들이 여러 가지로 부러운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도서관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그중에 하나다. 요즈음은 공립도서관뿐만 아니라 행정 단위별로 작은 도서관도 잘 갖춰져 있고, 학교마다 도서관 시설이 훌륭하게 구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예산을 들여서 학기마다 새 책을 들여온다. 원하는 책을 신청하면 구입해 주기도 하니 필자에게는 부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학생들은 갈수록 책과 멀어져 가고 있다. 학교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찾고 빌려 읽으면서 지적인 모험심으로 학창시절을 보내는 청소년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일상생활과 학업에 선용하기도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틈만 나면 스마트폰에 몰입해서 연예 프로를 보거나 게임에 몰두한다. 수업 시간에도 교사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 달랑 들고 등교하는 학생들도 보인다. 그 작은 액정 속에서 학생들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다양한 분야의 책을 통해 삶의 비밀을 엿보고 창의성을 키우면서 아름답고 평화로운 미래를 구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청소년들이 더 바람직하고 좋은 길을 찾지 못한다면 기성세대의 책임도 크다. 그들이 어른이 되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하기보다는 우려가 앞선다. 가을이 진정한 독서의 계절이 되기를 고대한다. 정용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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