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소아과 문 열자 '대기 89명'…필수의료 진료난 갈수록 태산
분만 가능한 산부인과 급감…10곳 중 8곳 "분만 안 해요"
"정원 확대 더불어 수가 인상 등 필수의료 투자 강화해야"
(서울=연합뉴스) 김잔디 권지현 기자 = "소아과 가려고 '똑닥'(병원 예약 접수 모바일앱) 열리자마자 눌렀는데, 대기가 89명이더라고요. 결국 오후 1시 넘어서 진료받았어요."
서울 강남구에서 생후 6개월 아들을 키우는 이모(36) 씨는 소아청소년과 진료 예약을 '1분 컷'이라고 표현한다. 똑닥에서 진료 예약이 시작된 후 1분 내에 예약을 마쳐야만 그날 진료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기약 없는 대기 시간을 인내하는 건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기본 소양이라고도 했다.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외과, 응급실 등 필수의료 분야의 붕괴가 현실화하면서 애꿎은 환자와 보호자들의 불편이 커지고 있다.
정부가 2025년도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것도 의사 공급을 늘려 이러한 필수의료 붕괴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읽힌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의대 정원 확대와 더불어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가 있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소아과 '오픈런'은 일상…새벽부터 '번호표 대기'
이씨가 다니는 동네 소아청소년과는 오전 9시에 문을 여는데 보통 오전 8시부터 현장에서 줄을 서기 시작한다. 병원은 이들을 먼저 등록한 후 오전 9시 10분부터 똑닥으로 진료 신청을 받는다.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다가 바로 접수해도 오전에 진료받는 건 운이 좋을 때나 가능하다.
이씨는 "지금이야 육아 휴직 중이니 기다리지, 복직하고 나면 애가 병원 갈 때마다 연차를 써야 할 판"이라며 "나아질 거라고 기대도 안 한다"고 말했다.
소아청소년과 '오픈런'은 일상이 됐다.
지역 기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부모들끼리 대기 상황을 공유하는 것도, 엄마가 아이를 돌보는 사이 아빠가 새벽같이 번호표를 뽑아 놓는 것도 새롭지 않은 풍경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박모(40) 씨 역시 오전 7시께 문도 열리지 않은 소아청소년과 앞에서 기다리다 번호표를 받은 경험이 있다.
박씨는 "평일이었는데도 대여섯명이 열리지 않은 소아과 앞에 줄을 서 있었다"며 "오전에 접수 못 하면 그날은 진료 못 받는다고 봐야 한다"고 전했다.
소아과 전공의 어디서 구하나…'정원 미달'에 '중도 포기'까지
소아청소년과 진료 대란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을 전망이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확보율은 2020년 71%에서 올해는 25.5%까지 급락했다.
애초에 목표한 전공의 모집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가운데,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되기 전에 이를 포기하는 비율도 늘어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실이 보건복지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중도 포기율은 2017년 6%에서 지난해 23%로 크게 늘었다.
개업하는 소아청소년과도 줄고 있다. 소아청소년과 개업 건수는 2018년 122곳에서 매년 줄어 지난해에는 84곳으로 떨어졌다.
그 결과 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주요 필수과목 전문의 중 40대 이하 연령대는 줄고, 50대 이상은 큰 폭으로 증가하는 고령화가 가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소아청소년과 의료체계 붕괴를 막기 위해 내놓은 대책도 현장에서는 큰 반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소아청소년과 전공의에게 매월 100만원의 수련 보조 수당을 추가로 지급하고, 야간과 응급 진료 보상도 높이겠다고 밝혔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정부가 내놓은) 수가 보상안은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며 "이러다간 소아 의료체계 붕괴가 머지않았다"고 질타했다.
소아과 더불어 '분만 인프라'도 위험…"필수의료 투자 확대해야"
의료계에서는 소아청소년과와 더불어 산부인과의 상황도 위태롭다고 전한다.
고질적인 저수가에 위험 부담은 상대적으로 큰 분만을 회피하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현영 의원이 국민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7월까지 전국 산부인과의 82%는 분만 수가를 청구하지 않았다.
병원은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면 심평원에 분만 수가를 청구한다. 분만 수가 청구가 없다는 건 해당 병원에서 출산이 없었다는 뜻이다.
김동석 대한개원의협의회 회장(산부인과 전문의)은 "분만 수가가 55만원인데 아이를 하나 받으려면 최소 3명은 붙어 있어야 한다"며 "이런 고질적 저수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에서도 분만 수가를 현실화해달라고 요구한다. 분만 수가를 400% 인상하고, 분만 사고 보상금의 80%를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 등을 중심으로 필수의료 붕괴가 가시화되면서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단순한 의사 수 증원을 넘어 시스템을 개선하는 작업이 함께 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김윤 서울대 의대(의료관리학) 교수는 "의대 정원 확대와 더불어 제도나 정책이 같이 정비되는 게 필요하다"며 "병원에서 필수의료를 보는 의사들에게 더 많은 보상이 돌아가고, 충분한 인력이 일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jand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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