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바늘 꿰맨 무릎' '아픈 팔꿈치' '결승 불발 아쉬움' 딛고 딴 메달… 그 뒤엔 지자체의 묵묵한 후원
도봉구, 국내 유일 브레이킹 실업팀 창단
서울시, 체조·클라이밍에 아낌 없는 지원
3인방 "내년 파리올림픽서 만나요" 각오
최근 막을 내린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는 수많은 스타가 탄생했다. 지방자치단체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선수들도 값진 성과를 내며 ‘금의환향’했다. 특히 수도권 지자체가 묵묵히 후원한 비인기 종목에서 우수한 성적이 나와 의미가 남달랐다. 도봉구청이 지난달 창단한 국내 유일 브레이킹 실업팀에서 뛰고 있는 은메달리스트 김홍열(39)과 체조 유일 금메달리스트 김한솔(28), 스포츠클라이밍서 은메달을 획득한 서채현(19)을 만났다. 김한솔과 서채현은 서울시청 소속이다. 이들은 지자체에 감사를 표하며 내년 파리올림픽 선전을 다짐했다.
낙담한 '브레이킹 전설'을 깨운 한마디
김홍열은 모든 경기를 마친 8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2주 전 발생한 일” “통증이 심해 걷지도 못했다”고 쓴 글과 함께 왼쪽 무릎을 꿰맨 사진을 올렸다.
11일 서울 마포구 연습실에서 만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아시안게임 개막 직전 비 오는 날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5바늘을 꿰맸어요. 며칠 쉬면 회복될 줄 알았는데, 부기가 가라앉지 않아 굽힐 수가 없었어요. 연습 때 무릎을 바닥에 댈 때마다 너무 아팠어요.”
경기 전날까지도 무릎을 바닥에 못 대는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김홍열은 목표를 ‘예선 1위 통과’에서 ‘예선 통과’로 급히 수정했다. 다행히 출전선수 25명 중 8위로 예선을 통과한 뒤 16강 라운드(4개 조로 나눠 1ㆍ2위만 8강 토너먼트 진출)에서도 조 2위에 올랐지만, 8강 대진표를 보고는 낙담했다고 한다.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아미르 자키로프(카자흐스탄)를 만난 것. 그는 “몸도 아프고, 예선 성적도 안 좋고, 16강 리그에서 심사위원 점수도 예상보다 박해 주눅 들어 ‘어렵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이 난관을 헤쳐나간 원동력은 의외의 말 한마디였다. 8강 경기 전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은 심리 담당 의료진에게 “오히려 잘됐다. 이길 생각하지 말고, 본인 할 것(연기)만 잘 하고 오라”고 격려를 받은 뒤 마음이 편해져 경기가 잘 풀렸다는 게 그의 얘기다.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각성 상태가 됐어요. 연기해도 별로 힘들지도 않고, 컨디션이 매우 좋아졌어요. 누구랑 붙어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죠.”
브레이킹 선수들은 10, 20대가 주류라 내년이면 ‘불혹’인 그는 사실 ‘환갑’을 맞은 노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체력적 열세와 부상까지 극복하고 승승장구하며 결국 결승에 올라 값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홍열은 “결승 연기 도중 왼쪽 종아리에 쥐가 나는 느낌이 들어 조심스럽게 했다”며 “아쉽게 초대챔피언은 놓쳤지만, 그래도 저는 이겼다고 생각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폐막식 기수로 선정되는 영광도 누린 그는 “기특하다고 봐주신 것 같다”며 “평생 춤만 추다가 더 인정받은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학창 시절 괜찮은 성적에도 “비보이를 하겠다”며 고등학교를 중퇴할 때 그를 만류하며 반대했던 어머니, 아버지도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연습실을 찾은 부모는 “공부 안 하고 춤춘다고 하면 어느 부모나 말렸을 것”이라면서도 “전 국민의 응원을 등에 업고 은메달을 딴 것도, 기수로 나선 것도 다 대견스럽다”고 미소 지었다.
소속팀인 도봉구청에 감사한 마음도 빼놓을 수 없다. 도봉구청은 실업팀이 전무한 브레이킹팀을 국내 최초로 창단(감독 1명, 선수 6명)해 인건비, 훈련장 임차료, 대회참가비, 피복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김홍열은 “비보이나 비걸이 개인 브랜드의 후원을 받는 경우는 있어도 실업팀 창단은 세계 최초인 걸로 안다”며 “나도 월급을 받아 직업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됐고, 경제적으로 더 자유로워져 춤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고마워했다. 오언석 도봉구청장도 “앞으로도 도봉구청 브레이킹팀이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뒤에서 든든히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김홍열은 내년 7월 파리올림픽을 겨냥하고 있다.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대회로 꼽히는 ‘레드불 비씨 원 월드파이널’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2회(2006ㆍ2013년) 우승을 차지하고, 40세 가까운 나이에도 정상급 기량을 유지해 브레이킹 세계에선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그에게 올림픽 챔피언은 이제 유일하게 남은 목표다. “나이가 들어 몸이 예전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챔피언이 아닌 도전자 입장이라 생각해요. 실력 있는 젊은 선수들과 꾸준히 경쟁하고, 더 열심히 훈련해 결실을 이뤄야죠!”
AG 2연패 후 올림픽 위해 수술대
기계체조 남자 마루운동에서 완벽한 연기로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선 김한솔 역시 부상 투혼을 발휘했다. 지난해 10월쯤부터 왼쪽 팔꿈치 통증으로 고생하던 그는 진통제와 통증완화 주사를 맞은 뒤 붕대까지 칭칭 감고 뛰었다. 이런 고통을 이겨내고 마루운동 2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팔꿈치를 펴면 뼈끼리 부딪쳐, 손을 짚는 동작을 할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정작 시합에 나서면 긴장돼 그런지 통증을 못 느끼고, 연기가 끝나면 다시 아프더라구요. (웃음)”
체조선수 치고 노장에 속하는 터라 체중관리를 엄격하게 해 항상 59㎏을 유지한다. 그는 “중력을 거슬러 내 몸을 이겨내야 하는 운동이라 500g만 쪄도 운동할 때 몸이 무겁다는 게 느껴진다”며 “지난달 30일 귀국하고서도 친구와 고기 먹으러 갔는데 딱 1인분씩만 먹었다”고 했다.
서울시의 지원에도 감사를 표했다. 특히 훈련장과 숙소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시가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서울체고를 훈련장으로 대관해 주고, 경기 남양주에 숙소도 마련해줘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숙소가 없으면, 저는 충남 괴산 집에서 출퇴근해야 하거든요.”
이번엔 김한솔이 보답할 차례다. 그는 수술을 미루고 소속팀을 위해 국내 대회 중 가장 큰 대회인 전국체전 출전을 강행했다. 그리고 내년 파리올림픽을 위해 1년여를 미뤄왔던 수술대에 곧 오른다.
김한솔이 1군 실력을 갖췄음에도 부상으로 불참한 세계기계체조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14위에 그쳐, 상위 12개국(전년도 세계선수권 1~3위 포함)에 주어지는 올림픽 티켓을 놓쳤다. 그래서 내년 시즌 월드컵 대회에 출전해 선수들이 종목별 티켓을 따내야 하는 상황이다.
“내년 2월 말부터 월드컵 대회가 열려요. 수술 후 재활과 회복에 3, 4개월 걸린다고 해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요. 재활에 집중해 한두 달 정도 앞당겨 조기 복귀할 생각입니다.”
그는 2016년 리우올림픽, 코로나19로 1년 늦은 2021년 열린 ‘2020 도쿄올림픽’에 두 차례 출전한 베테랑이지만, 아직 올림픽 메달과는 인연이 없다. 김한솔은 “유니버시아드, 아시아선수권,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입상했지만 올림픽만 메달이 없다”며 “파리올림픽에 출전해 꼭 시상대에 설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금메달보다 결승전 못 뛴 게 더 아쉬워"
항저우 아시안게임 스포츠클라이밍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서채현은 모든 일정을 마친 뒤 SNS에 “입상한 세 선수 모두 우천으로 예선 성적으로 메달을 획득하는 건 원치 않았다”라는 글을 올렸다. 비로 결승전이 열리지 못하면서 준결승 순위로 메달 색깔을 정해 은메달을 목에 건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10일 만난 서채현은 “금메달 딴 일본의 모리 아이, 동메달리스트 중국의 장웨퉁 다 19세 동갑 친구”라며 “우리 모두 첫 출전한 아시안게임이라 결승 루트를 꼭 해 보고 싶었지만, 도전해 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고 말했다.
“준결승을 워낙 잘했고, 컨디션도 좋아 결승에 가면 난도가 조금 더 높아져 모리보다 체격 조건 좋은 저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대신 감독인 아버지가 ‘아빠는 네가 금메달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줬어요.”
서종국 서울시청 감독도 “금메달도 그렇지만 모리와 좋은 라이벌 관계라 그 친구들의 아름다운 대결을 보며 클라이밍을 대중에게 알릴 기회가 줄어든 것도 아쉽다”고 했다.
결승전이 예정보다 1시간 연기돼 기다리는 동안 뭘 했는지 물었더니 “선수들끼리 서로 소속팀 배지 교환하고, 일본 모리가 가져온 종이로 종이접기 하고 놀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영락없는 10대였다. 그는 “우리 셋 모두 유스 대회 때부터 만난 라이벌이면서도, 국제대회에서 처음 사귄 친구들이라 친하다”며 “경기할 때도 서로 루트를 어떻게 정복할 것인지 의견도 솔직하게 나눈다”고 했다.
서채현은 지난해 9월 국내 최초로 클라이밍실업팀이 창단된 서울시청 소속이다. 대회출전 비용, 훈련장비, 입상 시 포상금 등을 지원받으며 훈련하고 있다. 이번 전국체전에도 출전해 2관왕에 올랐다. 서 감독은 “실업팀 소속이 아닌 선수들은 각 시도 체육회의 지원을 받아 개별산악클럽 소속으로 뛴다”며 “다른 선수들에 비해 훨씬 안정적으로 훈련에만 몰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채현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2년 전 도쿄올림픽 결승에 올랐지만 입상에 실패한 아쉬움을 파리에서는 꼭 달래고 싶다. 일단 내달 9일부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예선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따는 게 1차 목표다. 그는 “그 이후 파리올림픽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무슬림 증오범죄에 美 6세 피살… 전쟁의 잔혹한 나비효과
- 신화 이민우 "믿었던 사람에게 전재산 갈취, 정신적 고통 커"
- [단독] 스승의날 인사 온 제자 성폭행 후 금품까지 요구한 사립대 교수
- 안철수·이준석 민망한 공방전... "응석받이" "아픈 사람"
- 백종원, 식당서 의식 잃은 종업원 심폐소생술로 구해
- 사설구급차 타고 행사장 간 김태우, 운전기사 실형에 "변명 여지 없다"
- "김기현 대표 쫓겨나겠네ㅜㅜ"… 조수진 카톡 창에 뜬 메시지
- '돌싱글즈4' 제롬 "베니타와 영화 보며 데이트…극장서 키스했다"
- [단독] '순살아파트' 논란 LH, 올해도 셀프 포상잔치
- 가자 주민 유일한 탈출구 막은 '이슬람 국가' 이집트…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