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일본 맥주 마시면 친일파? 젊은 세대는 웃는다
친일파나 친중파는 아냐
1030은 정치와 문화 분리
애국 가장한 편가르기 제발 그만
고등학교 동창 C와 종종 그의 집에서 맥주를 마신다. 입맛이 비슷하기 때문인데, 특히 일본 맥주에 감자튀김을 곁들여 먹는 걸 즐긴다. 굳이 일본 맥주인 건 특유의 건조하고 쌉쌀한 맛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가라구치(辛口)’라고 표현하는 그 맛이다. 얼마 전에도 함께 맥주를 마시는데 그가 ‘노 재팬’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나라에서 ‘노 재팬’ 기류가 한창일 때 편의점에서 일본 맥주가 모두 사라져 아쉬웠다는 것이다. “요즘은 어느 편의점에 가도 팔더라”라는 그의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동안 억눌렸던 수요가 폭발하는지 올해 들어 일본 맥주 판매량이 급증했다. 수입 맥주 판매량 1위를 탈환했다. 어디 맥주뿐인가. 몇몇 일본 위스키는 ‘오픈런’마저 벌어지고 있다. 연초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비롯한 일본 애니메이션이 극장가를 휩쓸었다. 덩달아 일본 문화 열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현상을 주도하는 건 당연히 젊은 층이다. 이들이 기성세대보다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건 어려서부터 자주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 세대에게 ‘슬램덩크’나 ‘드래곤볼’이 있었다면 우리 또래에게는 ‘원피스’와 ‘강철의 연금술사’가 있었다. 이들 만화에서 파생된 유행어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개중에는 기성세대의 시선에서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려울 법한 작품도 있는데, 일본 설화를 차용하기도 한 닌자 무협 만화 ‘나루토’가 대표적이다. 일본 소년 만화의 전성기였던 200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30대들만 하더라도 이런 문화가 결코 이질적이지 않다.
일본 문화에 대한 넓은 포용력은 경제‧문화적인 것과 정치‧역사적인 건 분리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다이쇼 시대 검사(劍士)를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 ‘귀멸의 칼날’에 열광하는 청년 중 그 시절 일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사람은 없다. 남매 간 우애라든가 권선징악 같은 인류 보편적 감정에 매력을 느낄 뿐이다. 덕분에 ‘귀멸의 칼날’ 극장판은 팬데믹 시국에도 무려 215만 명을 동원했다.
일본만 그런 게 아니다. 마라탕과 탕후루는 10대, 20대의 높은 반중 정서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20대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게임 ‘리그오브레전드’의 운영사도 중국 기업 텐센트다. 이처럼 청년들이 일본 만화를 좋아하고 중국 게임을 즐긴다고 할지라도, 일본 우익의 망언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분노한다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일본에 대한 친구 C의 태도도 양가적이다. 그는 일본 콘텐츠를 좋아하지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에 대해 “정부가 더 강하게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고 비판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도 높게 평가한다.
불매 운동이 개인의 애국심을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모든 문화와 상품의 소비를 애국심과 결부시켜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목적에 의한 강요는 더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 경제든 문화든, 교류하는 이웃 국가의 모든 걸 배척할 순 없다. “다시는 지지 않겠다”며 이를 애써 외면하니 친일파 척결하자면서 자신들은 홋카이도 여행 계획을 세우고 렉서스를 모는 모순이 발생한다.
애국을 가장한 정치적 편 가르기는 다른 무엇보다 반일 몰이에 염증을 느끼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국회의원들이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 이후 “내년 총선도 한일전”이라고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오죽 그 이야길 하고 싶었으면 대만과의 야구 결승을 한일전으로 착각한 의원도 있었다. 독일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게 정치라고 했다. 장담하건대 일본 맥주 좀 마신다고, 일제 샴푸 좀 썼다고 친일파로 만들어 버리는 정치라면 나중엔 남아나는 친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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