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황금을 둘러싼 비극적 연쇄살인… 인간 탐욕을 고발하다
19일 개봉 ‘플라워 킬링 문’
1870년대 초 미국 인디언 오세이지족은 오클라호마주 북동부의 인디언 보호 구역으로 강제 이주된다. 어느 날 이 땅에서 석유가 터진다. 홍인종이라 천대받던 인디언들은 벼락부자가 된다. 저택을 사들이고 백인 하인을 둔다. 언젠가부터 인디언들이 하나둘 시신으로 발견된다. 경찰은 파헤치지 않는다. 수년 후 FBI가 잇단 죽음의 흑막을 밝히기 위해 나선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뭉친 영화 ‘플라워 킬링 문’(19일 개봉)은 탐욕과 악의 뿌리에 대한 통렬한 질문이다. 애플스튜디오는 향후 애플TV+에도 공개할 이 작품을 위해 제작비 2억달러(약 2700억원)를 들였다. 러닝타임 3시간26분. 어지간한 시리즈물 4편에 해당하지만, 충만한 에너지를 밀도 높게 끌어간 대가의 노련함에 206분이 훌쩍 지난다. 주간지 ‘뉴요커’ 출신인 작가 데이비드 그랜이 10여 년에 걸쳐 저술한 원작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Killers of the flower moon, 국내 발간 제목은 ‘플라워 문, 463쪽’)과 비교해 보면 영화의 포인트가 더욱 뚜렷해진다.
◇누가 무엇을 VS 왜 어떻게
원작은 전국의 문서 보관소에서 찾아낸 수천 쪽 FBI 기록, 재판·의회 기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인디언 학살을 추적한다. 논픽션이지만 누가 무엇을 했는지 따라가는 추리와 미스터리 요소가 강하다. 영화는 방향을 틀었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인 헤일(로버트 드 니로)과 조카 어니스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연쇄 살인의 주범임을 알려주고, 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주목한다. 사료에서는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와 심리가 영화적 상상력으로 재구성돼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온다.
제목이 주는 시적인 상징도 쉽게 드러난다. 플라워 문은 5월에 뜬 둥근 달. 달이 뜨고 키 큰 꽃들이 피면서 4월에 피었던 오종종한 꽃들은 흩날려 땅에 묻힌다. 백인이 설치한 거대한 유정(油井)이 고개를 쳐들면서 죄 없이 사라져간 인디언의 목숨을 의미한다. 이때의 킬러는 돈에 눈먼 교활하고 어리석은 백인들이다. 교활의 대표가 헤일, 어리석음의 대표는 어니스트다. 관객은 이들을 통해 사랑과 배신, 음모와 폭력의 목격자가 되며 3시간 26분간 역사의 배심원으로 스크린 앞에 함께 앉게 된다.
◇팩트로 463쪽 VS 영상미와 연기로 3시간 26분
책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돈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한 문장이다. 영화에서는 갑자기 땅이 터지며 오일 기둥이 공중으로 솟아오르고 검은 천사가 날개를 펴듯 석유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장면이 장대하게 묘사된다. 마치 스코세이지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것이 영화다.’
원작에서 2장 분량 팩트만 서술된 오세이지족 여인 몰리와 어니스트의 관계가 영화 심장부에 있다. 특히 몰리 역을 맡은 신인 배우 릴리 글래드스턴의 연기가 빛난다. 그녀는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어니스트를 바라본다. 그녀는 알고 있다. “똑똑하지 않지만 잘생겼어. 그리고 돈을 원해.” 그러면서도 그에게 빠져든다. 실제로 그가 인디언 아내를 사랑했는지 알 수 없다. 영화에서는 디캐프리오가 사랑과 탐욕 사이에서 갈등하는 연기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카르텔과 시스템 폭로 VS 개인의 욕망에 집중
원작은 연쇄 살인에 눈감았던 정계, 법조, 경찰 등 카르텔의 전모를 보여주려 애쓴다. 영화는 시스템보다 개인에 집중해 인간의 본성을 파고든다. “탐구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해온 스코세이지의 영화관이 그대로 투영됐다. 원작에서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진 FBI 태동 스토리는 과감하게 들어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로 아카데미 각색상(1995)을 받은 각본가 에릭 로스의 감각이 돋보인다. 다만, 욕망을 추동했던 백인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간과되면서 인물의 선택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일부 있다. 어쩌랴. 자칫하면 영화가 6시간이 됐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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