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어르신, 건강하세요”라는 말이 놓친 것들
청량리시장은 ‘노인들의 홍대’라고 불릴 만하다. 시장은 물론 길거리와 식당 어딜 가나 노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시장에서 가까운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이나 청량리역에서 내리면 노인 승객이 너무 많아서 처음 가 보는 사람은 무슨 일이 났나 의아해할 정도다. 노인들의 클럽이라고 할 콜라텍도 여러 곳 있어서 빼입은 70~80대 노인들도 종종 눈에 띈다. 명절을 앞둔 청량리시장은 정말 금요일 저녁 홍대 앞처럼 붐빈다.
서울시가 지난 2018년 분석한 65세 이상 무임 교통카드 사용 내역에서도 이 사실이 드러난다. 노인 승하차 1위 역이 종로3가, 2위 청량리, 3위 제기동이다. 종로3가역 근처엔 탑골공원이 있지만 1·3·5호선 환승역인 것을 감안하면 1호선으로 갈아타고 청량리시장에 가는 노인들도 많을 것이다.
노인이 많은 곳에서는 노인이 갑이다. 혼잡한 길에서 장바구니 카트를 끌며 느릿느릿 걸어도, 마트 계산대 위에 동전을 꺼내 놓고 일일이 세어도 별 눈치 주는 사람이 없다. 이곳엔 키오스크나 셀프 계산대도 없다. 노인들은 젊은 세대에게 치이지 않는 곳을 찾아 청량리시장에 모이는 건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노인 비율이 46.5%가 된다는 2067년 극단적 초고령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지하철 무임승차족을 잡아내려고 노인들이 개찰구를 지날 때마다 “어르신, 건강하세요”라는 소리가 나게끔 했다가 며칠 못 가 그만뒀다는 기사를 읽었다. “늙었다고 망신 주는 거냐”는 노인들 항의가 잇따랐다고 한다. 청량리역이나 제기동역에서 시범 운영했다면 하루도 못 갔을 것이다. 어르신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퍼졌을 테니 말이다.
“어르신, 건강하세요”라는 말로 부정승차를 잡아내겠다는 발상은 전형적인 대상화(對象化)다. 65세가 넘으면 누구나 ‘어르신’이란 호칭에 거부감이 없을 테고 ‘건강하시라’는 말은 덕담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노인들은 카드를 찍을 때 들리는 ‘어르신’ 소리를 ‘공짜 손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건강하세요’를 덕담으로 들을 리 없다. ‘뭐하러 나오셨어요’로 들렸을 것이다. 급속히 노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갈등은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 어르신들은 어르신이라 부르며 접근하는 낯선 사람을 일단 사기꾼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2011년에 쓴 에세이 ‘늙은이들이 살아남는 방법’에서 특유의 독설을 내뿜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노인들은 점점 많아지고 더 오래 살며 이들의 연금과 생활보조금을 책임질 젊은 세대는 줄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노인들을 죽이는 수밖에 없다. 나치가 유대인을 색출해 처형했듯이 노인을 사냥하는 것이다. 이에 맞서 노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전쟁을 일으킨 뒤 자식과 손자들을 내보내 모두 죽이는 것이다. 그 후엔 누가 노인들의 연금을 댈까? 제3세계 저임금 노동자들의 이민을 대거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면 옛날 인도나 중앙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처럼 돈 많은 백인 노인들이 종을 부리며 안락하게 사는 나라가 된다.” 에코가 79세 때 쓴 이 끔찍한 유머는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고 고령화가 빠른 우리나라에 주는 경고로도 읽힌다.
우리는 이미 닥친 초고령사회 문제를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다. 그보다 훨씬 먼 미래의 일인 기후 변화나 에너지 문제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이것은 정치의 영역이지만 정치인들에게 인구 문제는 투표 성향으로만 의미가 있으니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반면 과학은 노인의 건강과 수명 연장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가고 있다. ‘노화의 종말’을 쓴 유전학자 데이비드 싱클레어는 “노화는 누구에게나 닥치는 생물학적 법칙이 아니며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라며 “다음 세기가 될 때쯤엔 120세를 ‘장수’로 표현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과학이 결혼하지 않는 것과 아이 낳지 않는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는 나라가 됐다.
경로 무임승차 카드의 악용은 초고령사회에서 파생된 여러 문제 중 하나다. 이것을 “어르신, 건강하세요” 식으로 해결하려는 데서 사회의 수준이 드러난다. 제도와 정책이 아니라 염치와 체면에 기대는 것이다. 머지 않아 20세 이하 젊은이들에게 지하철 무임승차권을 주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때도 카드 도용 문제가 생길 것이다. “젊은이, 환영합니다” 소리가 나게끔 했다가 철회됐다는 뉴스를 읽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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