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사랑이라는 신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2023. 10. 17.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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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40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끔찍한 분쟁은 약 4000년 전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와 후처 하갈의 집안 갈등에서 시작됐는데 적자 이삭은 유대교, 기독교의 시조가 되고 서자 이스마엘은 이슬람교의 시조가 된다. 성전(聖戰)이라는 미명하에 무수한 목숨이 스러졌다.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21세기 세계질서는 종교대립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예로 기독교와 이슬람을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교회에 갔다. 좋아하던 이성친구가 교회에 다녔기 때문이다. 사춘기 풋사랑에서 시작된 종교활동은 점점 그럴듯한 신앙의 모습을 갖춰 20대 시절 제법 큰 장로교회에서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 청년부 회장으로 신을 섬겼다. 하지만 나는 교회를 떠났다. 교회 안의 엘리트주의, 왜곡된 정상성 개념, 물신주의가 가난한 문학청년의 가치관과 어긋났기 때문이다. 교회뿐인가. 다른 종교단체들도 자본화한 세속적 욕망과 종교 이기주의를 그럴듯한 허울로 감추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을 보면서 '신은 죽었다'던 니체의 말을 떠올렸다.

오늘날 신이 몰락한 이유는 첫째, 공동체의 실재감 상실이다. 에밀 뒤르켐에 따르면 사람들은 교회에서 위로와 포용이라는 공동체적 감각을 통해 표상된 신의 이미지를 추종하는데 교회는 그들만의 카르텔이 된 지 오래다. 둘째, 종교의 아우라 붕괴다. 근대적 지성은 신을 감춰 보호하던 신비의 어둠을 과학이라는 빛으로 걷어냈다. 구약성서는 잘 쓰인 소설로 그 지위가 격하되고 종교는 '없음'에의 공허한 탐닉이 됐다. 셋째, 신이 침묵한 탓이다. 신은 세계의 온갖 비극을 그저 방관했다. 전쟁, 전염병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이 "당신은 언제까지나 침묵하고 있느냐"고 절규(엔도 슈사쿠, '침묵')했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리처드 도킨스는 아브라함에게서 갈라져나온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유일신을 가리켜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청소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심술궂은 난폭자"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음악축제 행사장의 무더기 시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어린아이들 주검을 보면서 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얼마 전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저우룬파)이 부산국제영화제 수상차 방한했다. 9600억원 전 재산을 기부키로 해 화제가 됐는데 자신은 그저 쌀밥 2그릇이면 족하다고 세상에 빈손으로 왔으므로 갈 때도 빈손이어야 한다고 말하며 '영웅의 본색'을 보여줬다. 그는 홍콩의 우산혁명과 반정부시위를 지지하기도 했고 늘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 진정한 '따거'다.

'영웅본색'에서 그가 말한다. "내가 바로 신이야. 자기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신이지"라고. 스튜어트 카우프만은 일찍이 '신은 인간이 하나의 강력한 상징으로 발명한 개념'이라고 했다. 신이 인간이 만들어낸 강력한 상징, 인간이 발명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라면 신의 부재와 몰락은 곧 사랑이 사라진 시대의 비극적 은유일 것이다. 김학중의 시 '요셉의 서'에서 신은 말한다. '요셉아, 인간은 아직도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나는 아직도 신이어야 하므로/ 네가 나를 만들라'고. 이 고백을 뒤집어보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때 비로소 신은 그 찬란한 얼굴을 우리에게 보일 것이다.

영화에서 "내가 바로 신"이라고 말하던 주윤발이 영화보다 더 잔인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 나는 사랑이라는 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도 유대교와 이슬람의 신이 아닌, 오직 사랑이 계시길 기도한다. 나는 사랑을 믿는 유신론자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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