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위대했던 한민족의 마라톤[이원홍의 스포트라이트]
온갖 어려움을 뚫고 출전한 뒤 2시간25분39초라는 당시 세계기록으로 정상에 오른 그의 활약에는 영화적 묘사를 떠나 그 엄연한 사실 자체가 가져다주는 묵직함이 있다. 이는 그에게 이르기까지 이전부터 오랫동안 쌓여온 고난의 무게를 함께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라톤 선수가 처음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였다. 당시 한국(조선)의 김은배 권태하 선수가 일본인 쓰다 세이이치로와 함께 출전해 김은배가 6위, 권태하가 9위를 했다. 두 선수는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지만 김은배는 사인 요청을 받으면 한글로 사인을 해주었다. 권태하는 결승선을 몇 m 남겨두고 쓰러졌는데, 제대로 걷지 못하는 상태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기어가다시피 하면서 골인하는 투혼을 보였다.
권태하는 연습할 때는 교통신호를 위반했다며 일본 경찰에게 맞고, 대표로 선발된 뒤에는 불심검문에 응하는 태도가 불량하다며 술 취한 일본 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등 순탄치 않은 출전 과정을 거쳤다. 그는 이후 손기정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손기정과 남승룡 두 명의 한국인이 마라톤에 참가했는데 일본은 마라톤 대표에 한국인 두 명이 있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 끝까지 두 선수 중 한 명을 올림픽 대표에서 탈락시키려 방해 공작을 펼쳤다.
하지만 이를 모두 극복하고 손기정이 2시간29분19초2의 올림픽기록으로 우승했고 남승룡이 3위를 했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손기정은 사인 요청을 받으면 모두 한글로 사인했고 사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이때 국적은 당당히 KOREA라고 적었다. 그는 시상식에서 들고 있던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려 했으며 국내에서는 동아일보가 그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했다. 이로 인해 손기정은 우승 후에도 일본의 감시를 받으며 고초를 겪었고 동아일보는 무기정간됐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는 손기정이 감독으로, 남승룡이 코치 겸 선수로 나섰고 이들의 지도를 받은 서윤복이 우승했다. 서윤복 이후 한국은 1950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아예 1∼3위를 석권했다.
영화는 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서윤복의 발굴과 우승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우여곡절과 극복 과정 등이 그려지고 마침내 태극기를 달고 우승으로 꽃피우는 내용을 다루며 막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실제 사실과 다르게 각색되기는 했지만 한국 마라토너들이 일제하에서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점,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저항과 노력을 했던 점, 그런 노력이 열매를 맺어 마침내 태극기를 달고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다는 점 등 핵심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감흥을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있지만, 영화에 대한 인상과 평가가 이들의 실제 활동 및 업적과는 구별돼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적 서사를 위해 여러 내용 중 일부에 초점을 맞추고 세부 내용을 각색할 수는 있지만 한국 마라톤에 대한 인식과 평가는 이것과는 별개로 입체적이고 다양한 관점에서 지속적이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마라톤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전후까지 민족적 억압과 고난 속에서도 불꽃 같은 흐름을 이어갔다. 서윤복을 그린 이 영화는 그중 일부의 내용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선수 개개인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를 수도 있지만 그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우리 마라톤의 뚜렷한 발전을 이뤄낸 것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힘겨운 시기에 일군 것들이었기에 빛이 난다. 허구가 아닌 생생한 현실 속에서 이뤄냈던 그들의 업적은 가상공간에서 펼쳐지는 영화 속 내용보다 위대하다.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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