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바뀌자 '전략 바꾸는' 살인범들…대법 명확한 판례도 없어
정유정도 처음에는 범행을 계획한 건 아니라고 했고, 신림동 성폭행 살인범 최윤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범행 저질렀습니까?) 우발적으로요."
미리 장소를 찾고 흉기를 준비해 놓고도 계획한 건 아니었다는 주장입니다. JTBC가 신상이 공개된 흉악범 49명을 분석한 결과, 과거에는 주로 심신미약을 주장했다면 최근엔 최윤종처럼 우발적 범행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법이 바뀌어 심신미약 주장이 안 먹히자 전략적으로 다른 핑계를 찾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여도현, 조해언 기자가 차례로 전해드립니다.
[여도현 기자]
2015년 살해한 아내의 시신을 시화호에 버렸던 김하일은 심신미약을 주장했습니다.
이틀 동안 잠을 못 잤다는 겁니다.
[김하일/긴급체포 당시 (2015년) : {왜 그런 범행을 했습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2016년에 수락산에서 여성 등산객을 살해한 김학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열흘 간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실제로 한동안 심신미약 주장이 많았습니다.
2010년부터 2018년까지 21명 중 심신미약 주장은 9명, 43%였습니다.
그런데 2018년 서울 강서구 PC방에서 직원을 살해한 김성수가 심신미약을 주장 할 수 있다고 알려지면서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김성수/검찰 송치 당시 (2018년) : 그때는 화가 나고 억울한 상태여서…]
이 심신미약을 폐지하자는 국민청원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겼습니다.
국회는 사건 두달 만에 '심신미약자는 형을 감경한다'에서 '할 수 있다'로 법을 바꿔 감경 의무를 없앴습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심신미약 주장은 크게 줄었습니다.
2019년부터 올해까지는 28명 중에 심신미약을 주장한 흉악범은 4명, 14%에 그칩니다.
[남언호/변호사 : 심신미약을 인정하는 판례나 선례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피고인들도 적용되지 않을 것이 뻔한데 굳이…]
대신 '계획성'을 부인하는 경우가 두드러집니다.
전 남편 살인범 고유정, 세모녀 살인범 김태현도 그랬습니다.
2010년부터 2018년까지는 21명 중 14명, 67%가 고의성이 없다거나 우발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019년부터 올해까지 28명 중에는 16명입니다.
범행을 인정하지 않는 6명을 빼면 계획 범행을 부인하는 비중이 73%에 달합니다.
전문가들은 흉악범들이 무거운 처벌을 피하려고 상황에 맞춰 전략을 세우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조해언 기자]
강도 연쇄 살인범 권재찬에게 1심은 '계획살인'이라며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반면, 2심은 '우발 살인'으로 보고 무기징역으로 낮췄습니다.
[권재찬 (지난 2021년 12월) : (계획범행 아닙니까?) …]
계획성 여부에 대해선 뚜렷한 판단없이 대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됐습니다.
전자발찌 강도살인범 강윤성도 1심은 "계획범'으로 결론냈습니다.
하지만, 2심은 '우발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리 계획했는지가 사형이냐 무기징역이냐를 가를 정도로 중요한 기준이지만 대법원의 명확한 판례가 없는 겁니다.
심신미약도 여전히 형을 낮추는 수단입니다.
신림동 무차별 흉기살인범 조선은 '피해망상'을 주장했습니다.
정신질환 전력을 드는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심신미약 판단은 법관이 한다는 25년 전 판례에만 기대고 있습니다.
범인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전문적인 기구도 있지만 역시 최종 판단은 법관 몫입니다.
반성문도 도마에 오릅니다.
딸의 친구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어금니아빠 이영학의 반성문에 대해 1심은 "진심이 아닌 감형 수단"이라며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반면, 2심은 무기징역으로 낮추며 "위선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진지한 반성'이란 추상적인 기준을 놓고 다른 해석을 한 겁니다.
우리나라는 살인죄를 무겁게 처벌하는 방향으로 법이나 기준들을 바꿔 왔습니다.
하지만, 형량에 반영하는 이런 모호한 기준들을 바꾸지 않으면 흉악범의 판결 때마다 나오는 논란은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상디자인 김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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