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지도자의 품격
며칠 전 서울대는 ‘세계 한인 통일평화 최고지도자 과정’이란 이름 아래 세계 한인 리더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예상을 웃도는 지원자들로 프로그램은 성황을 이뤘다. 세계 각국에서 1년에 두 번 서울대에 들어와 각각 3박4일, 5박6일 오프라인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사이 3개월간은 온라인으로 수강해야 하는 이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에 대해 교내에선 기대치가 높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 열기가 남달라 모두가 놀랄 정도였다.
본 프로그램에는 하태경·이인영 두 현역 의원과 윤영관·정운찬·반기문 등 전직 관료와 정치 지도자들이 열강에 나섰다. 한국 사회의 중도좌우를 망라하는 최고 지도급 인사들이다. 이분들에 대한 참석자들의 관심과 질의, 토론의 수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강의에 대한 청중 평가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무릇 지도자의 품격과 자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때론 화려한 언변으로 좌중을 사로잡고, 때론 외모나 옷매무새 같은 신체적 장점이 모든 걸 압도하기도 한다. 말과 글, 외모 외에도 몸말, 즉 ‘보디랭귀지’가 남다른 설득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정치인들의 보디랭귀지도 연습과 학습에 의해 체현되는 건 마찬가지다. 패션에도, 드라마에도 유행이 있듯이 정치 지도자에 대한 기대치도 유행이 있다. 필자는 청중들이 어떤 정치 지도자를, 그들의 어떤 자질을 평가하는지를 유심히 살펴봤다.
강의 열정으로만 따지면 70대 중반에 접어든 정운찬 전 총리가 무선 마이크 하나를 달랑 쥐고 강의실을 오가면서 좌중을 쥐락펴락하는 장면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자”라는 동반성장 구호를 뇌리에 남기기 위해 수많은 에피소드를 던지는 쾌도난마식 강연은 한국 경제학의 인적 자산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드문 장면이었다.
대북 정책에 대한 현역 정치인의 두 강의는 그 내용만 비교하면 서로 티키타카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런 식의 비교에 익숙한 재외 한인 지도자들의 관심은 두 의원의 강의 내용이나 논리 전개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눈앞의 정치 지도자가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사심을 떠나 공심으로 뛰고 있는가를 판단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런 청중들에게는 화려한 언술도 중요하지만 신중한 몸말과 진정 어린 응대가 만들어 내는 공감의 설득력도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단상에서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시종일관 진지하고 성실하게 답변한 국문학도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평화의 경제학을 얘기할 때 환호가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지역구를 버리고 서울로 무대를 옮기는 결단을 얘기하며,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가’이고 싶다는 바람을 얘기할 때도 모두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시종일관 강조한 전환기 한반도에 대한 강의를 곱씹으며, 대한민국호를 이끌어갈 고국의 지도자에게 이들이 바라는 덕목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언변을 자랑하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도 아니요, 연신 ‘어퍼컷’을 날리며 내전을 독려하는 ‘야생의 리더십’도 아닌 성싶었다. 기후변화 대책을 역설하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몸소 실천한 절약, 생활 속에 묻어 있는 절전의 삶에 대한 작은 에피소드를 들려줄 때 서민 속에 자리한 정치 지도자의 품격에 감동의 쓰나미를 느꼈다고들 했다.
행사 중에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침공과 인질극 소식이 들려왔다. 인사청문회 도중에 문을 박차고 나가 ‘김행랑’이란 별명을 단 장관 후보자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막장극의 리스트’가 길어져만 가고 있다. 요즘 ‘막장 드라마’가 팔리지 않는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현실 세계에 막장이 판을 치니, 막장으로 장사해 온 드라마들이 막을 내리고 있는 게 아닐까?
세상 사람들은 반듯한 정치 지도자에 대해 높은 기대를 갖기 시작했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신중하고 사려 깊음으로 무장한 ‘준비된 관료’들을 찾고 있는 듯하다. 보궐 선거의 결과보다 ‘역대급 투표율’이 말해주는 참여의 열정 역시 서울대 최고 지도자 과정에서 확인한 열망과 동일하다. 돌이켜보면 “불확실성의 시대, 세계 한인들이 지구촌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라는 유홍림 서울대 총장의 환영사에 모두 환호작약했던 것도, 의례적 갈채가 아니었던 것 같다. 오랜 정치사상 연구에서 배어 나오는 차분하고 느린 톤의 저음이 전달하는 온화한 리더십과 진정성에 대한 격한 공감이지 않았을까? 다시 철학의 시대가 오려나 보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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