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바람과 함께 사라져야 할 것들
요즘 들어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자주 떠올린다. 즐겨 보는 드라마 <연인>의 설정 상당 부분이 이 소설에서 왔기 때문이다. 청소년 시절 거의 외울 정도로 이 책을 되풀이해 읽었고 강인하고 솔직한 여성 스칼렛 오하라를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책에 대해 말하기가 꺼려졌다. 기록적으로 흥행한 만큼 논란도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책의 제목이 뜻하는 것은 주인공이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할 수 있던 시절이 전쟁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시절이란 미국 남부 대농장의 풍요로움이고, 이를 떠받친 것은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이었다. 노예제가 있던 시절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책에는 스칼렛과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노예제를 불편하게 여기는 인물들도 나온다. 오랫동안 잘 작동해 온 체제라 해도, 내게 아무리 편안하고 익숙해도 그 아래서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지점에서 균열은 시작된다.
며칠 전 클로디아 골딘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를 연구해 온 골딘 교수는 수상 기념 기자회견에서 한국 기자의 질문을 받고 “한국의 출산율이 0.86명인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 기록적 저출생 현상의 해법에 대해서는 “기성세대와 남성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면서도 “어려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 해법이란 곧 수십 년간 당연히 여겨 온 것들을 포기하는 일이기에, 얼마나 어려울지 잘 안다는 의미일 것이다.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 열심히 일하고 어머니는 아이들 잘 돌보며 알뜰하게 살림하는 ‘정상 가족’의 이상이다. 또는 대기업들이 수출로 계속 성장하면 근로자 임금이 오르고 잘살게 된다는 이상이다. 물론 이것들은 허상이 아니다. 한국에서 산업화 이후 중산층이 되고 자산을 이룩한 대부분은 이 체제 안에서 성실하게 산 사람들이다. 정부도 기업도, 그리고 노동조합도 이 체제가 흔들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아래 억눌려 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 이상 속의 어머니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 부부의 딸은 충분한 교육을 받고서도 경력을 지속할 수 없다. 딸이 어떻게든 경력을 이어가려 하면 그 어머니가 다시 억눌려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이 성장해도 그만큼 임금이 오르지 않는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직원들이 있고, 몫의 배분에서 아예 배제된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들이 있다.
골딘 교수가 말한 ‘기성세대와 남성들’은 체제에 안주한 사람들을 뜻한다. 기존 체제가 익숙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불편함을 예민하게 느끼고, 외면하기보다는 가진 걸 내려놓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균열이 생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최근 정치적 사안에서 성과를 냈다고 자축하고 다음 선거 승리를 다짐하는 정치인들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승리한다고 무엇이 바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체제 존속을 위한 덧대기식 처방을 ‘진보’라 여겨온 것은 아닌지, 그마저도 누구보다 체제에 안주해 있으면서 불편을 못 느끼는 사람들에게 맡겨놓은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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