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들 사회안전망 외면한 2024년 예산안
[세상읽기]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정부가 작성한 2024년 예산안이 문제다. ‘약자복지’를 하겠다면서 청소년, 장애인, 이주노동자, 아동, 여성, 노인 등의 필수 사회안전망 예산을 대거 삭감했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일까? 총체적으로는 잇따른 부자감세 세제개편으로 5~6년간 총 89조원에 달하는 감세효과가 예상(나라살림연구소)되는 현실부터 문제다. 여기에 경제 불황기일수록 정부가 민생 안정을 적극 도모해야 하는데도 역대 최저 증가율 지출안을 국회에 냈다.(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과도한 공격과 비난, 모욕을 해오던 ‘국가보조금’도 일방적으로 삭감됐다. 수많은 국가보조금 집행처 가운데 시민단체, 노동단체를 콕 집어서 비난하더니 예산에서도 이런 기조가 이어졌다. 필자는 국가보조금 중 일부 항목이 집행되고 있는 여성폭력 피해 지원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 내년 예산안이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매우 심각하다.
고용노동부 사업 중 ‘고용평등상담’ 예산안을 보자. 고용평등상담실은 직장 내 성차별과 성희롱 등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여성노동자를 상담 지원하는 민간 여성노동상담 창구다. 2000년 처음 시작돼 24년째를 맞으며 전국 19개 기관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고용평등상담실 지원 보조금을 전액 삭감했다. 고용노동부는 국가보조금 연장평가서를 근거로 든다. 2022년 국고보조사업 연장평가보고서 내용은 어떨까? 보고서는 고용평등상담실이 ‘신속한 정보제공’, ‘분쟁 사전 예방’, ‘해결이 용이하지 않은 사안은 신속한 권리구제 등 실효성 높이는 데 기여’한다고 평가한다. “코로나19로 취약한 고용상태의 근로자가 노동시장에서 비자발적으로 이탈한 것을 고려하여 더 적극적인 사업의 추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면상담보다 전화상담과 인터넷상담 비중이 높은 것을 짚고 이를 고려해 ‘접근 가능성을 높이라’고 제언한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엉뚱하게도 8개 지청에서 1명씩 고용해 직접 상담하겠다는 예산안을 내놨다. 지청별로 고용된 1명이 특수고용노동자,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 초단시간 노동자 등 노동법 사각지대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를 위해 얼마나 발로 뛸 수 있을까. 성희롱과 성폭력, 모성보호, 괴롭힘, 고용차별이 중첩되고 소송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사안을 끝까지 챙기고 지원할 수 있을까. 정부는 24년간 16만8070건을 상담하며 쌓아온 고용평등상담실의 역사성, 현장성, 다른 사회적 자원과 연계한 협력체계, 분쟁 과정 속에서 여성노동자 곁을 지키는 독립성 등 피해자 지원의 조건을 와해시키는 예산안을 편성한 것이다.
여성가족부는 또 어떤가? 내년도 가정폭력상담소 인원을 1명씩 줄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전국 26개 ‘여성폭력 통합지원센터’를 만들겠으니 여기에 응모하라고 통보했다. 그 어떤 현장의 목소리도 들어보지 않은 채, 그 어떤 연구 결과도 근거로 제시하지 않은 채 시행하려는 여성폭력 통합지원센터는 무엇일까? 지금도 스토킹, 데이트폭력 피해자를 전국 성폭력상담소, 가정폭력상담소에서 지원하고 있으며, 상담소 형태 중 통합상담소는 이미 존재한다.
그럼에도 새로 여성폭력 통합지원센터를 만들겠다면서 ‘가정폭력상담소’만 통합지원센터에 지원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전국 14개 성폭력상담소, 성매매피해상담소, 1366에서 3년째 진행하는 디지털성폭력피해자 지원 업무도 내년 1월부터 해당 가정폭력상담소로 이관하라고 통보했다. 이미 성폭력상담소에서 디지털성폭력, 스토킹, 데이트폭력을 모두 지원하고 있는데, 2024년 1월부터 ‘여기에서는 상담받으실 수 없으니 새로 생긴 전국 26개 센터로 가시라’고 안내해야 할까? 현장의 목소리를 조금도 듣지 않았으니 현장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예산안이 나왔다.
2024년 예산안은 무조건적인 지출 감소, 무조건적인 국가보조금 삭감 기조가 찍어 누른 상상 속 계획서다. 민생과 필수 사회안전망을 나 몰라라 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구체적으로 보면, 현장에서 국가보조금이 어떻게 집행되는지, 피해자 지원 기관의 역할과 의미, 한계와 대안이 무엇인지 그동안 익히 보고 협력해온 정부 부처에서도 스스로의 경험과 지식을 배반하는 예산안을 짜내고 있다. 민생과 필수안전망이 구멍 나기 시작하면 그 부담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민생’과 ‘복지’와 ‘안전망’이 곧 내 삶인 시민들이 2024년 정부예산안을 읽고 되묻고 요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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