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예산삭감에 꽂혀서 놓쳐버린 R&D 체질 개선
한국의 과학계에선 금기시하는 몇 가지 말들이 있다. 개편, 통폐합, 구조조정 같은 말이다. 출연연구기관 가운데 설립된 지 오래 돼 소명과 임무를 다한 기관을 개편해 새 환경에 맞게 임무를 주자는 주장은 대표적인 금기의 사례로 꼽힌다. 출연연이 한때는 우리 사회의 공공 R&D(연구·개발)를 주도하며 한국의 과학기술과 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업이 더 잘 하는 연구가 등장하고 그다지 임팩트 있는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편 대상이 되곤 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광주과학기술원(GIST),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등 4개 과학원의 통합 문제도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제다. 국내 대표 과학기술특성화대인 KAIST조차도 세계 50위권 밖에서 수년째 정체된 상황에서 국제 경쟁력을 올리려면 4개 학교를 통합해 규모를 키우고 단일한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는 구상은 최근 10년새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금기의 주제들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만 되면 등장했다가 아주 잠깐 화제를 모을뿐 별로 진전된 논의로 나아가지 못했다. 대부분 R&D를 잘 모르는 일부 인사의 머리에서 즉흥적으로 나왔거나 지역주의와 결탁한 이해당사자들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동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합리적 토론으로 이어지기는 보다는 잠깐 시끄럽다가 이내 잦아드는 주제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의 직장을 없애거나 일자리를 빼앗을 때나 쓰던 말이니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계조차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보다는 격렬한 반대 목소리가 더 큰 건 당연할지 모를 일이다.
그래선지 과학계에서도 새 정부의 의지가 가장 충만한 출범 초반을 중요한 시기로 본다. 지난해 1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과학계 원로와 중진 과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공공과학기술혁신협의회 행사에서 송철화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회장은 “정부 출범 후 1년에서 1년 반 이내에 꼭 추진하고 싶은 정책을 관철하지 못하면 그 뒤엔 아무것도 바꾸기 어렵다”고 말했다. 5년마다 정부가 바뀌는데 왜 과학계에선 매번 똑같은 과제가 반복해서 올라오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송 회장에 따르면 20년간 정부가 매번 바뀔 때마다 힘이 있을 때면 과학 정책은 경제 정책이나 복지 정책에 언제나 밀렸다. 그리고 정부 출범 중반 쯤만 되도 의미있는 정책을 내놔도 힘 있게 추진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정권 초에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바심에서 나온 성급한 결정이었던 걸까. 내년도 R&D 예산을 16.6%(5조2000억원)나 싹둑 잘라냈다가 범(凡)과학계의 역풍을 맞은 윤석열 정부를 보면 앞으로가 걱정이다. 최근 5년간 10조원 가까이 늘며 급격히 몸집을 불린 R&D예산의 효율화, 정상화를 추구한다는 정부 설명과 명분은 정말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R&D 전반을 비효율과 범죄가 일상화된 비리 현장으로 보고 ‘R&D카르텔’로 몰아간 것은 여권 인사들조차 인정하는 최악의 악수였다. 특히 가장 직격탄을 원로도, 중견도, 공직자도 아닌 학생 연구자와 신진 과학자들이 맞게 되면서 국민들의 걱정은 크다.
안타까운 사실은 과학계는 내년 예산의 원상회복을 낙관하고 있지만 정작 정부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미 예산을 늘리기보다는 과학계 원로와 기관장, 전문가를 동원해 이번 삭감의 정당성을 확산하는 여론 형성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런 가운데 과학계 반발은 노조와 학회 같은 기성 연구자를 넘어 미래 과학도인 학생층으로 더 확대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과학계 공방은 직접적인 대화나 소통 창구 없이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예산 삭감 이슈가 앞으로 장기간 대학 경쟁력 확보, 출연연 개혁 같은 현안을 모두 빨아들이는 과학계 이슈의 블랙홀이 됐다는 점은 매우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모든 연구기관에 대해 20% 안팎의 일괄 삭감 방식으로 단기간에 삭감이 이뤄지면서 효율과 비효율을 나누는 엄밀한 기준을 만들지 못한 것은 향후 얼마든지 비효율 문제가 다시 불거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 우려할 만하다.
실제로 지금도 R&D에 더 투자할 때인지 다이어트가 필요한 지를 두고 엇갈린 시선이 있다. 과학자들은 한국의 R&D 예산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건 20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해외 선진국이 100년 넘게 투자한 것에 비하면 이제 걸음마를 겨우 마쳤다고 보고 있다. 한국이 기초 과학에 대한 투자에 대해 본격 투자하기 시작한 건 10년 안팎에 불과한데 이런 삭감 여파가 기초 연구 위축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
대통령과 R&D 효율화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생각과 달리 출연연의 개편과 새 역할 설정, 과기원 통폐합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본질적인 문제와 직결된다. 예산을 깎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다이어트에서 식사량을 확 줄이고 먹지 않고 살을 빼는 방법은 당장은 눈에 띄는 결과를 낼 수는 있다. 하지만 먹을 건 먹어가며 하는 다이어트와 체질 개선이 더 건강하고 지속적인 몸 관리 방법이 된다는 점은 익히 잘 알려진 상식이다. 지금 같은 방식이라면 설사 R&D 예산 감축을 통한 구조 조정과 효율화가 일부 성공한다고 해도 한국의 과학이 체급만 줄고 비효율이라는 만성 소화불량에 계속 걸려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쯤되면 효율화에 대한 정의도 개선이 필요하다. 반도체와 이동통신 기술인 CDMA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술이 적은 예산으로 높은 성과를 낸 것은 그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이룩한 흔치 않은 성과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R&D 다이어트가 체질 개선보다 무조건 감량만 선택한 것은 그래서 성급한 면이 많다. 과학계를 설득해 금기를 넘어설 해법을 찾는 대신 너무 쉬운 방식으로 비효율의 문제를 풀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예산만 깎고 과학계와의 소통은 단절된 채 정말 필요한 R&D 체질 개선이란 숙제는 계속해서 남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걱정은 지금까지 사례를 보면 윤석열 정부 역시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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