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수박 단물은 대주주만 먹나”…“일반 주주 이익에 충실해야”
한국 기업 가치가 다른 나라의 기업보다 평가 절하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의 핵심 원인은 현행법상 기업 이사가 주주 이익을 위해 일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기업 거버넌스(지배구조) 분야 전문가들은 ‘이사의 충실의무’ 법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놨다. 상장 기업의 저평가는 주주행동주의 관점에서 보면 투자 기회가 커지는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KCGF)은 16일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Two IFC 빌딩에서 ‘전문가 입장에서 본 기업 거버넌스’를 주제로 제1회 특강을 열었다. 발표자들은 거버넌스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관련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사의 충실의무’는 상법 제382조 3항에 있다.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법은 어떻게 부자의 무기가 되는가(2020)’의 저자 천준범 변호사는 “국내 다수설에 따르면 해당 상법의 내용 중 ‘회사를 위해’라는 부분은 주주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문제로 지목했다. 천 변호사는 “주주에 대한 의무가 없으니, 회사가 돈을 잘 벌어도 주식을 산 사람들에겐 배당을 적게 주는 등 주주 이익이 소외되며 기업 가치도 떨어진다”고 했다. 그는 “회사가 맛있는 수박을 만들어도 단물을 빼고 주주에게 나눠주는 셈”이라고 했다.
현재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주주 이익을 위한 이사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미국은 ‘듀티 오브 로열티(Duty of loyalty)’라는 법으로 이사가 회사의 주주들에 대해 투철한 충성심을 보여야 한다고 명시한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JPX)는 2015년 이사회는 주주들에 신의성실을 다할 책임이 있다는 내용의 법을 제정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주주들에 대한 회사의 공평한 대우 및 권리를 공시하고 있다.
천 변호사는 주주들의 집단소송법은 한계를 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국내 상법은 자세히 명시돼 있는 장점이 있지만 주주들의 권리를 위한 집단소송법 부분은 막혀 있다”며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 개정은 (회사의) 주주에 대한 의무를 명시하며 주주 보호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행법상 대표이사의 배임·횡령이 발생했을 때 주주들은 그 피해에 대해 집단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 집단소송에서 이기더라도 피해 보상액은 회사로 향하고 주주에겐 개인적으로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는 주주들이 직접 집단소송을 제기할 동기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이달 11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선 김현 이화그룹 소액주주연대 대표가 투자자 보호제도 제정을 제안한 바 있다. 앞서 올해 5월 김영준 이화그룹 회장과 김성규 총괄사장이 700억원 규모의 횡령 혐의로 구속되자 이화그룹 3사(이화전기·이트론·이아이디)는 지난달 상장 폐지됐다. 이화그룹 소액주주연대에 따르면 피해 소액주주들은 약 38만명에 달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주주들이 개인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고 실제 집단소송도 활발하다는 게 천 변호사의 설명이다.
높은 수준의 상속세율과 배당소득세율도 주주 가치를 낮추고 지배주주가 사익을 추구할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행동주의 투자자로 알려진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는 영상 강연에서 한국의 최고 상속세율은 60%로 OECD 회원국의 평균 최고 상속세율(27.1%)과 비교하면 과도하고, 한국 배당소득세율(50%) 역시 OECD 평균(28.3%)보다 약 2배 정도 높다고 했다. 이 대표는 “현재 국내 상법이 이사의 수탁자 의무를 회사에 대해서만 규정하니 대주주는 이익을 소액주주와 나누거나 주가를 높일 유인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이런 상황이 지속될수록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대표는 제도적 여건이 마련되는 상황이라면 국내 상장기업의 저평가는 곧 투자 기회라고 했다. 이 대표는 “거버넌스 문제 등 기업의 저평가 요인은 투자할 요인을 제공한다”며 “관련 제도 개선 등으로 행동주의 투자 전략이 가능해지는 발판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이남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한국 기업 거버넌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배주주의 과도한 영향력과 이를 견제하지 못하는 이사회를 들었다. 이 교수는 “경영진과 이사회 모두 전체 주주의 장기적인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며 “그래야 기업의 지배구조를 탄탄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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