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용산리대첩 지휘관 이성근 예비역 대령 “반드시 기억해야”
“9·19 용산리대첩은 남북한 저강도 전쟁으로 정전협정 이후 한미연합방위체제에서 최대의 전과였다.”
파주시 진동면 9·19 용산리대첩(경기일보 9월18·20·27일자 10면) 관련 당시 현장 지휘관(중위)이었던 이성근 예비역 대령(81·육사 21기)은 경기일보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잊혀진 작전이 아닌 승리가 기억되고 이어지도록 기념공원 등이 조성되게 파주시, 국방부, 미2사단이 노력해 달라”면서 55년 만에 처음으로 육성으로 증언했다.
이 예비역 대령은 육사 졸업 후 전방 수색대에서 초임 장교로 근무하던 중 정전협정 이후 휴전선 방어를 책임졌던 주한유엔군사령부 소속 미2사단에 카투사로 구성된 대간첩중대 부대 CAC(Counter Agent Company)로 근무지를 옮겼다. 1967년 1월 CAC는 5개 소대로 병력은 300명이었다. 파주 봉일천 캠프 하우즈가 본부였다. DMZ 수색정찰 등을 수행했다. 이후 JSA부대 QRF(기동타격대)로 통합돼 역사가 계승되고 있다.
그러던 중 1968년 9월19일 용산리대첩이 발생했다. 이 예비역 대령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오전 2시30분깨 북한군 124군 한 팀(5명)이 침투하다 발각되자 임진강변 갈대밭에 숨었다. 미군들은 한국의 키 큰 갈대밭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어 수색명령을 꺼렸다.
그래서 이 예비역 대령 소속 CAC가 자원해 갈대밭에 들어갔다.
이 예비역 대령은 소대원들을 지휘하며 오전 5시30분께 리비교 건너편에 도착, 소탕작전에 돌입했다. 작전 돌입 약 5시간이 경과한 후 그와 소대원은 북한군 5명을 모두 섬멸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명의 아군 희생자도 나왔다.
아군 희생자는 5소대 소속 병장 박만득·병장 김상훈이다. 전남 승주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전역을 보름 앞두고 산화했다.
이성근 예비역 대령은 “9·19 용산리대첩은 CAC의 자랑이자 정전 이후 벌어진 한미연합 방위체제에서 최대의 전과”라며 “이 대첩 이후 북한이 파주와 서울로 이어지는 서부전선 침투로가 차단됐다고 판단해 해상 침투와 땅굴 침투 등으로 돌아서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김요섭 기자 yoseopkim@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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