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부양책 극도로 경계하며 “총선에 신경쓰지 마라”

한겨레 2023. 10. 1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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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천일야화][길을 찾아서] 참여정부 천일야화 36화 장기주의 대통령
눈앞 성과에 집착 단기부양책 남발…
관료들도 오랜 습관처럼 부양책 애용
노 대통령, “원칙 잃지 않고 꾸준히 가야”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5월15일 오전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헌법재판소의 탄핵기각 결정과 관련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미래에 부작용을 불러올 인위적 경기부양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눈앞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장기주의자로서 확고한 소신이었다. 연합뉴스

2003년 5월26일(월) 9시 수석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경기 문제를 언급했다.

“경기는 나쁘다가도 살아난다. 근본과 원칙을 잃지 않고 꾸준히 가야 한다. 3개월, 1년, 총선으로 결판나지 않는다. 여러 국정과제위원회가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특히 동북아, 균형발전, 정부혁신에 장기 비전이 있다. 보기만큼 상황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늘 소관이지만 올해 가뭄, 산불, 황사가 없다. 당선 초기에는 전쟁 위험 때문에 전전긍긍했지만 한미공조, 정상회담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정말 어려운 것은 서민경제다. 앞으로 경제에 전념할 생각이다.”

당시 불경기 때문에 여론이 나쁜데도 노 대통령은 반짝 경기를 호전시킬 응급치료보다 근본적, 장기적 경제정책에 관심을 두었다. 어려운 서민경제 대책은 세우되 나중에 부작용을 가져올 인위적 경기부양은 쓰지 말라고 거듭 내각에 지시했다. “경기 나쁘다고 내가 욕먹어도 좋습니다. 멀리 보고 원칙대로 갑시다.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습관처럼 부동산 경기부양책을 가져오는 경제부총리가 있었으나 노 대통령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찍이 이런 대통령은 없었다. 노무현은 최초의 장기주의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은 가끔 성군 세종시대를 열었던 태종 이방원 이야기를 했다. 태종처럼 악역을 맡겠다는 말도 했다. 태종은 고려 충신 정몽주, 이복동생인 방석과 방번,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죽였고 외척 발호를 막는답시고 사돈인 심온(세종의 장인)과 처남 4명을 몽땅 처형한 잔인한 군주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태종을 닮겠다는 것은 이런 잔인함은 물론 아니고 뒤에 오는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2003년 6월11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참여정부 첫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그동안 우리 경제가 금융과 실물부문 모두 어려웠지만 최근 금융시장이 조금 안정됐다면서 이제 고비를 넘겼다”고 설명했다. 왼쪽부터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이사장, 나웅배 스페코 고문, 조순 민족문화추진회장, 노무현 대통령, 김진표 경제부총리. 노무현사료관 제공

6월11일(수) 3시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촉장 수여 및 제1차 회의가 열렸다. 김중수 한국개발연구원장이 최근 경제동향을 보고했고, 김진표 경제부총리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설명했다. 조순 자문회의 부의장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쟁쟁한 자문위원들이 경청할만한 발언을 했다.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 “첫째,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핵심은 노사 문제다. 둘째, 투자에서 대기업 비중이 40%나 되니 무시해서는 안 된다. 대기업은 공과가 함께 있다. 셋째, 구조개혁 추진이 중요하고 부동산 경기부양, 소비 진작 등 단기 처방은 자제해야 한다. 넷째, 경제부총리 중심으로 정책을 끌고 가야 한다.”

사공일 전 장관. “첫째,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 불필요한 규제는 철폐하고 법치와 투명사회를 확립해야 한다. 둘째, 정부의 정책 조정기능을 높이려면 부총리 중심으로 경제정책을 운용하고 팀워크를 살려야 한다. 폐지한 경제수석이 필요하다. 셋째, 노사문제는 법치부터 세워야 한다. 법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

김종인 전 수석. “IMF 사태 이후 경기가 세차례나 순환했다. 2001년 9·11사태 이후 위기감이 커졌다. 부동산, 카드채 등 온갖 문제가 터져 나왔다. 일본 경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인내가 필요하다. 인위적 수요 진작을 경계해야 한다. 노사문제는 중요한데, 이대로 가다가는 안 되겠다는 인식이 노사 간에 있을 때 비로소 해결이 가능하다.”

이런 의견도 있었다. “선장(경제부총리)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정부는 관여할 일과 관여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 금융시장은 기업금융이 파괴되고 가계금융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 중이다.”(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위원장) “과거 상명하복 문화에서 민주화 쪽으로 가야 한다. 비효율이 있지만 선진국 진입을 위한 비용으로 간주해야 한다.”(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정부의 힘은 무한하지 않으므로 과감히 시장에 맡겨야 한다. 정책의 신뢰성이 중요하고 부총리 중심으로 가야 한다.”(김병주 서강대 교수) 인수위 경제2분과 간사를 맡았던 김대환 인하대 교수는 “경제정책의 방향을 성장과 분배의 조화로 삼자. 시장친화적 산업정책, 기업금융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마무리 발언을 했다.

“장기적으로 경제 체질을 약화시킬 인위적 경기부양책은 쓰지 않겠다. 부총리 중심으로 가되 시간이 걸린다. 왜냐하면 업적을 쌓아야 도덕적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 금융감독위, 한국은행의 독자성을 존중하겠다. 서로 협의해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자. 청와대 경제수석 부활을 권고하는데 책임 총리, 책임 장관과 모순된다.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 두개의 머리로 갈등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경제수석을 없앴는데 과연 필요한지 좀 더 두고 보자(얼마 뒤 경제수석은 부활했다). 노사관계는 제어가 필요하다. 먼저 파업부터 하고 보자는 태도는 잘못됐다. 가급적 대화하고 그 다음 법과 원칙을 내세워야 한다. 언론은 항상 정부를 공격한다. 경제는 심리라고 하는데 이러다가 대통령보다 국민이 피해를 볼까 봐 걱정이다.”

6월24일(화) 9시 국무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있는 예산은 일부 폐지, 축소해도 좋다. 그렇게 하면 소비가 감소해 경기에 불리하지만 그래도 잘못은 고쳐야 한다. 내년 총선을 의식하지 마라. 경제성장과 민생 문제에 대해서는 월 1회 정도 보고해달라.”

7월2일(수) 오전 하반기 경제정책협의회가 열렸다. 재경부 김영주 차관보(뒤에 경제수석, 산자부 장관)이 4.2조원 추경과 신보, 기보의 1조원 추가 출연 계획을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현재의 불경기가 과거 불경기에 비해 특별히 심한지 물었다. 김효석 의원이 현재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렵고, 국제비교를 하면 한국은 성장률과 투자율이 낮지 않다고 답했다. 노 대통령은 당장의 성장률에 연연하지 말고 경제팀이 합심해서 장기적 경제체질 개선에 주력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4.2조원 추경과 1조원 출연을 잘 지켜 내년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고, 특히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이 쓰러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항상 “내가 욕먹어도 좋으니 다음 정권에 부담을 줘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7월4일(금) 11시 내 사무실에서 조동철(KDI), 전승훈(조세연), 김진방(인하대), 최흥식(금융연), 임주환(한은), 이언오(삼성연), 허찬국(한경연) 등 전문가들이 참석해 경기전망 및 대책을 토론했다. 거시경제 전문가인 조동철(현 KDI 원장) 박사는 올 하반기는 상반기보다 악화하지 않을 것이므로 추가적 경기부양책은 쓰지 말 것을 권고했다. 전승훈 박사도 하반기 경기 호전을 기대하면서 성급한 경기부양책에 반대했다. 위에서 본 것처럼 국민경제자문회의의 경제 원로들도 그랬고 거시경제 전문가들도 이구동성으로 당장에 반짝 성과를 내지만 오래 부작용을 일으킬 단기부양책을 경계했다.

문제는 경제관료들이다. 이들은 오랜 습관처럼 단기부양책을 애용했는데 아마 당장 성과를 요구하는 대통령 앞에 뭔가 내놓아야 하는 강박관념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를 필두로 역대 대통령들은 단기주의에 빠져 눈앞의 성과에 집착했다. 대통령이 장관들에게 성과를 재촉하니 장관들은 부하 공무원들을 독촉했다. 재경부 캐비넷에는 각종 단기부양책이 상비약처럼 비치돼 있었다. 그래서 머지않아 부작용이 나타날 단기부양책을 남발하곤 했다. 일종의 마약 중독 현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달랐다. 2004년 5월15일 노 대통령이 탄핵에서 풀려나 직무에 복귀하던 날 청와대 앞마당에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할 때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도 노 대통령은 부작용이 발생할 인위적 경기부양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확고한 소신이었다. 눈앞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은 장기주의자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필자 이정우: 1950년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1974년 서울대 경제학과 학·석사를 마친 뒤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2015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한 뒤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2003~05년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 정책기획위원장 겸 정책특보를 지냈다.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끊임없이 공부하는 경제학자를 자임하고 있다. ‘참여정부 천일야화’ 제목은 그의 친필이다. opi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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