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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건반 위의 음악감독, 길을 개척한 피아니스트 송영민 [인터뷰]

정주원 기자
입력 : 
2023-10-16 15: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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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마포아트센터 ‘수아레 콘서트’
기획·연주·해설로 고상지 등과 무대
드라마 ‘밀회’ 출연 이후 다방면 활동
살롱콘서트 등 클래식 대중화 앞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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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드라마 ‘밀회’에 주인공 피아노 연주 대역으로 출연 후 연주자, 해설자, 음악감독 등으로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송영민. 사진제공=마포문화재단

무대 위 피아노 한 대와 연주자 한 명. 피아니스트는 종종 말 한마디 없이 피아노로 관객에게 말을 건다. 그렇게 될 때까지 음을 갈고 닦았을 모습은 흡사 수도자를 연상시킨다. 다만 그 말을 단번에 알아듣는 관객이 많으리란 건 지나친 낙관이다. 숏폼이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200여 년 전 만들어진 곡을 40분 동안 한자리에 앉아 들으라는 것만도 무리한 요구다.

그래서 피아니스트 송영민(37)은 마이크를 잡는다. 공연장을 찾은 관객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하기 위해서다. 그가 대중에게 이름 석 자를 각인시킨 건 2014년 방영된 인기 드라마 ‘밀회’를 통해서였다. 남자 주인공 선재(배우 유아인)의 피아노 연주 대역, 오리지널 피아니스트가 바로 그다.

지금은 연주자이자 해설자, 기획자, 음악감독 등으로 전국을 누빈다. 7년째 최인아책방 콘서트 음악감독을 맡고 있고, 한 해에 소화하는 공연이 70여 회에 달한다. 그가 가을의 한복판, 18일 서울 마포문화재단 M클래식 축제 ‘수아레 콘서트’ 무대에서 기획, 연주, 진행 등 1인 다역으로 관객과 만난다.

‘수아레’는 프랑스어로 저녁 시간에 여는 파티라는 뜻. 이번 파티는 사랑과 세월을 노래하며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시간이다. 슈만이 아내에게 결혼식 전날 선물한 곡 ‘헌정’을 시작으로, 첼리스트 박건우가 드보르자크의 가곡 ‘날 홀로 내버려 두세요’ 등을 연주한다. 바리톤 안동영의 중후한 목소리로 듣는 김효근의 ‘첫사랑’ 등과 고상지의 반도네온 연주로 피아졸라의 ‘망각’ 등 탱고곡이 이어진다.

송영민은 이 모든 곡에 피아노 연주와 해설로 함께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연주만으로도 진이 다 빠질 정도라 강인한 체력이 요구되는데, 곧바로 마이크를 잡고 좌중을 휘어잡는다.

“연주회는 ‘잘 차린 코스요리’ 같아
자신만의 해설로 관객 대접해야”

그에겐 2017년 최인아책방 음악감독을 맡은 이래 쌓아온 경험이 곧 비결이다. 당시 독주회를 앞두고 출연한 라디오 방송에서 음악가로서의 꿈을 묻는 진행자 질문에 “젊은 연주자를 위한 무대, 클래식 청중의 폭을 넓히는 데 힘쓰고 싶다”고 말했는데, 곧바로 현실이 됐다. 이걸 들은 최인아 대표가 ‘함께 해보자’는 블로그 쪽지를 보내오면서다. 만 13세에 홀로 유학을 떠나 러시아·독일에서 평생 연주자로 훈련받아온 그가 ‘밀회’ 오디션 도전, 방송·영화 출연에 이어 또다시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그게 입소문을 타 지금까지도 마이크를 잡고 전국을 누빌 줄은 그땐 미처 몰랐지만 말이다.

뛰어난 언변까지 갖췄으니 유튜브 구독자를 늘려봐도 좋을 텐데, 그는 현장을 고집한다.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스피커도 접해봤지만 현장 음향은 절대 따라올 수 없다. 클래식은 반드시 현장에서 들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현장 관객을 위해 그가 준비하는 건 ‘잘 차린 코스 요리’다. 관객이 대접받고 간다는 생각이 들게끔 해설의 내용부터 곡의 흐름, 무대 위 연주자의 동선까지 신경을 쓴다.

물론 다양한 공연장과 전문 기획사에서도 이런 노력을 한다. 그러나 연주자 출신이 기획한 공연엔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그는 믿는다. 평생 음악을 공부하고 업으로 삼았으니 깊이와 진정성을 따로 비길 이유가 없다. “제 해설은 검색창에 쳐도, 팸플릿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예요. 제가 음악가로서 이 곡을 어떻게 보는지, 어떻게 해석했는지, 연주할 때 하는 생각을 얘기하죠. 그러면 관객들도 곡에 금방 이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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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드라마 ‘밀회’에서 주인공의 피아노 연주 대역으로 출연 후 연주자, 해설자, 음악감독 등으로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송영민. 사진제공=마포문화재단
“늦게 빛 보는 연주자, 포기 않기를
음악가 진로는 연주 외에도 다양해”

음악에 대한 진심은 역설적으로 그가 음악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빛났다. 독일 데트몰트 국립음대에 재학 중이던 스물살 무렵이다. 유명 콩쿠르 입상 경력도 없고, 한국 음악계에 변변한 인맥도 없어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게을리한 것도 아니고 연습만 하며 살았는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대 후반이 지나 빛을 보는 음악가는 지휘자가 아닌 이상 거의 없잖아요. 차라리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써먹을 수 있는 여행사에 취직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짐을 쌌죠.”

다시 그를 붙잡은 건 음악이었다. 당시 학교에 온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연주를 듣고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오히려 “나는 저 경지엔 도저히 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다만 “이 좋은 피아노를 안 하면 평생 후회하겠다”는 생각도 함께였다. 이후 여러 대학원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으며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는 라이프치히 국립음대 최고연주자과정으로 게랄드 파우트를 사사하면서 피아니스트 김다솔·원재연·김희재 등과 연을 쌓았다. 실력도 늘었다. “결국은 포기하지 않았기에 좋은 시간이 왔던 것 같아요. 각자 빛이 나는 시간은 다르죠. 저는 서른 넘어서 풀릴 운명이었나보다, 그 시간을 잘 견뎌냈구나 싶어요.”

송영민의 지금은 누군가의 미래다. 그가 개척한 길이 어느 음악 전공자의 진로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모든 음악 전공자가 다 연주자가 될 순 없는 게 현실”이라며 “다양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했다. “저와 비슷한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다면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당장 안 풀린다고 혹은 당장 성공을 거뒀다고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말해주고 싶어요.”

그에게 앞으로 기억되고 싶은 수식어가 있는지 물었다. 드라마 ‘밀회’가 9년 전 막을 내렸는데 여전히 그를 대표하는 게 타당할까. 그에게 인지도를 쌓게 해준 성공의 증거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될 수도 있진 않을까. 최근 활발히 새로운 연주·기획에 힘을 쏟는 그의 활동 내력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당사자는 의연하다. “이젠 지겨운 단계도 넘어갔다”고 했다. “나라는 사람을 알리게 된 게 이 작품인데 뭐가 문제겠어요. 히트곡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가수가 될 수 있잖아요. 저에겐 감사한 작품이죠.”

앞으로도 송영민은 길을 멈출 생각이 없다. 그는 영원한 피아니스트를 꿈꾼다. 최근 공연 준비와 새로운 영상 콘텐츠, 최인아책방 콘서트 등 많은 작업 사이 틈틈이 피아노 레슨을 따로 받고 있다. 그는 “지난해 말부터 시작해 제 자신도 실력이 느는 게 보인다”며 “피아노 치는 방법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단점은 다른 사람이 속속들이 알긴 어렵잖아요. 그걸 혼자 연습해서 메꾸고 덮는 게 아니라, 아예 도려내는 수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한편으론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내가 부족해서 좋아질 부분이 많으니까요. 저는 앞으로도 그냥 ‘피아니스트’로 불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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