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치는 감정 누르고 기도하듯 노래할래요”
극강의 테크닉 요구하는 벨리니 ‘노르마’ 공연
‘카스타 디바’ 불러…“마리아 칼라스가 기준점”
“반주는 최소한이고 목소리만 들리는데, 노래는 길고 관객들은 끝날 때까지 숨을 죽이죠. 정말 어려운 노래예요.” 벨리니 오페라 ‘노르마’의 주역으로 나선 소프라노 여지원(43)은 ‘카스타 디바(정결한 여신)’를 “두렵고 겁 나는 노래”라고 표현했다. 소프라노 아리아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노래다. 지난 13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여지원은 “감정을 폭발하는 드라마틱한 역할이 제 특기이지만 이번엔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누르고 평화롭게 기도하듯 부르려 한다”고 했다. 여지원은 스스로 “고음 소프라노는 아니다”라고 했지만, 그대신 풍성하고 음역이 넓은 목소리가 특장점이다.
‘노르마’는 20세기 전반까지 거의 공연되지 않았다. 노르마 역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소프라노를 찾기 어려워서였다. 4명의 소프라노가 나눠 불러야 할 정도로 음역이 다양한 데다 극강의 테크닉과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까지 필요한 어려운 배역이었다. 이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갖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가 1950년대 이 오페라를 되살린 이후 지금도 전 세계에서 자주 공연된다. 여지원은 “제게도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노래가 하나의 기준점이 된다”며 “몽세라 카바예의 노래도 참고한다”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카스타 디바’는 모든 오페라를 통틀어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힌다. 16일 예술의전당 간담회에서 지휘자 로베르토 아바도는 “강렬하고 신비적이면서 에로틱하고, 중동의 분위기도 풍기는 매력적인 아리아”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쇼팽의 녹턴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이 곡은 베르디와 바그너에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높이 평가했다.
여지원이 국내에서 오페라 주역으로 나서는 건 처음이다. 2014년 대구에서 푸치니 ‘투란도트’의 류 역할을 맡은 게 전부다. 크게 주목받는 가수가 아니었던 그에게 2015년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거장 리카르도 무티(82)에게 발탁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것. 2017년엔 베르디 ‘아이다’의 주역으로 다시 잘츠부르크 무대를 밟았다. 이 페스티벌에서 한국인 소프라노 주역은 처음이었다. 그는 요즘도 ‘비토리아 여(vittoria yeo)’란 이름으로 쉴새 없이 유럽 무대를 누빈다. 올해와 내년에 ‘오텔로’와 ‘맥베스’, ‘투란도트’와 ‘나비부인’, ‘아이다’ 등 다양한 배역을 모두 주역으로 소화한다.
그가 ‘노르마’ 역을 맡은 건 2019년 이탈리아 라벤나 페스티벌에 이어 두 번째다. “어렵지 않게 관람할 수 있는 오페라예요. 지금도 어디에선가 일어날 법한 일들이거든요.” 그는 주인공 노르마를 “정해진 규범 속에 주어진 역할만 하도록 키워졌으나 사랑을 하면서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인물”이라고 본다. “극단적 믿음은 위험하다”는 게 그가 오늘의 시점에서 읽는 이 작품의 메시지다.
‘노르마’는 과거 이탈리아 5000리라 지폐에도 등장했다. 작곡가 빈센초 벨리니의 초상화와 함께였다. 이탈리아 수많은 오페라 중에 지폐에 새겨진 오페라는 ‘노르마’가 유일했다.
오는 26일부터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르는 ‘노르마’는 2016년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가 제작한 작품이다. 당시 연출가 알렉스 오예, 지휘자 로베르토 아바도가 그대로 이번 제작을 맡았다.
여지원은 두 사람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연출가 오예와 지휘자 아바도가 지난 6월 이탈리아 로마 오페라극장에서 ‘나비부인’을 공연 중이었는데, 주역 소프라노가 갑자기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됐다. 급히 대타를 찾아야 했다. 마침 여지원이 로마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바리에서 ‘오텔로’ 공연를 앞두고 리허설 중이었다. 여러 차례 공연을 함께했던 오예 연출이 전화로 대신 나서 달라고 요청하자 여지원은 주저하지 않고 로마행 택시에 승차했다. 12시쯤 전화를 받고 로마 오페라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4시40분이었다. 일요일이라 공연 시작은 4시30분. 곧바로 의상을 갈아입고 리허설 한 번 없이 무대에 올라 주역 초초 역을 소화했다. 여지원은 “그 배역의 감정선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며 “그 지역에서도 상당한 이슈가 됐던 사건”이라고 떠올렸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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