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 ‘기억의 습작’에 숨멎는 전율, ‘떼창’은 없었다
“오래된 테이프 속에 그때의 내가/ 참 부러워서 그리워서/ 울다가 웃다가 그저 하염없이/ 이 노랠 듣고만 있게 돼 바보처럼”(김동률 ‘오래된 노래’)
15일 저녁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의 1만 관객들은 모두 이 노래 속 주인공이 됐다. 각자의 추억이 서린 ‘오래된’ 노래들을 들으며 미소 짓고 눈물지었다. 가수 김동률이 지난 7일부터 이날까지 여섯차례 펼친 공연 ‘멜로디’는 6만 관객들에게 또 하나의 추억을 안기며 막을 내렸다.
2019년 이후 4년 만의 공연이었다. 김동률은 “‘무슨 올림픽 가수냐’는 얘기도 있지만, 자의가 아니라 타의(코로나 팬데믹) 때문이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의 공연은 ‘피케팅’(피 튈 만큼 치열한 티케팅)으로 유명하다. 이번 공연은 역대 최다인 6만석인데도 예매 서버 다운까지 일으키며 순식간에 매진됐다. 김동률은 “티케팅으로 이번처럼 욕 많이 먹은 적은 처음이다. 저도 재미 삼아 참전했다가 당황했다. (준비 제대로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번 무대는 관객들에게 ‘역대급’ 선물이 됐다. 김동률은 보통 공연에서 유명 히트곡보다 덜 알려진 곡 위주로 선보인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평소 잘 안 부르던 히트곡들을 줄줄이 들려줬다. “오랜만에 하는 공연에서 뭘 부를까 고민하던 중 산책하면서 제 노래를 들었어요. 유독 그날 히트곡들이 반갑게 다가왔어요. 저도 이렇게 반가운데 관객 여러분은 훨씬 더 좋아하시겠다는 생각에 역대급으로 대중적인 세트리스트를 만들어봤어요.”
공연의 문을 연 노래는 3집 ‘귀향’(2001)의 히트곡 ‘사랑한다는 말’과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관객들은 대번에 노래가 품은 그 시절 시공간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이어 전람회 시절 곡 ‘마중 가던 길’과 솔로곡 ‘오래된 노래’, ‘아이처럼’을 잇따라 불렀다. 덜 익숙한 곡도 빼놓지 않았다. 반도네온 연주자 고상지가 탱고 스타일로 새롭게 편곡한 3집 수록곡 ‘망각’과 2018년 발표한 탱고 곡 ‘연극’ 무대는 그 어떤 히트곡보다 강렬한 기운을 뿜어냈다.
인터미션 뒤 2부 첫 곡은 ‘황금가면’이었다. 지난 5월 발표한 최신곡으로, 그의 노래 중 템포가 가장 빠르다. 어릴 적 꿈을 잊고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전하는 노랫말을 담았다. 김동률은 “이 곡 나오고 지인들 연락을 많이 받았다. 특히 초등학생 자녀를 둔 40대 초반 남자들이 오열했다고 하더라. ‘이렇게 빠른 곡을 듣고도 울 수 있구나, 다들 공감해줬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고 소회를 전했다.
곧이어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데뷔곡 ‘꿈속에서’를 불렀다. 서동욱과 결성한 듀오 전람회로 1993년 엠비시(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노래다. 이듬해 ‘기억의 습작’이 담긴 전람회 1집을 발표했고, 1998년부터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뒷얘기도 들려줬다. “원래 대학가요제에 ‘쇼’(김원준이 1996년에 발표한 댄스곡)라는 노래로 나가려 했어요. 그런데 참가 직전 드러머가 팀을 탈퇴했죠. 그래서 급조한 게 (재즈풍 발라드) ‘꿈속에서’였어요. 만약 ‘쇼’로 나갔다면 제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그는 자신의 최고 히트곡이라며 ‘취중진담’을 불렀다. 연이은 고음의 노래를 안정적으로 소화하고는 “이번 공연은 무리하게 금메달 따고 싶어서 트리플악셀 7개 집어넣은 피겨 쇼트 프로그램 같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그는 “오래 음악 한 사람은 어렸을 때 만들어 히트시킨 곡을 넘어서는 게 어려운 숙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 내려놓고 ‘지금 내가 느끼는 걸 만들면 되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심정으로 만든 또 한곡을 다음 달에 발표한다”고 예고했다.
무대에는 밴드·코러스·안무팀에다 하프를 포함한 관현악단까지 모두 63명이 함께했다. 곡마다 색다른 편곡을 시도해 오래된 노래도 새 노래처럼 들렸다.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조명은 ‘빛의 향연’이란 수식어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면서 그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어요. 매진된 이 공연도 저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항상 불안해하고 그 불안을 원동력 삼아 저를 채찍질하고 노력해서, 언젠가는 공연장을 다 채우지 못할 날이 오겠지만, 그런 날을 조금씩 뒤로 더 미루고 싶어요.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 조금 더 멋지게, 조금 더 늙어서 곧 만나요.”
그리고는 마지막 곡 ‘기억의 습작’을 부르기 시작했다. ‘떼창’은 없었다. 관객들은 저마다 습작 같은 시절의 기억에 젖어 노래를 음미했다. 독일에서 온 양서영(49)씨는 “1996년 해외로 나간 뒤 힘들 때마다 김동률 노래로 위안을 얻었다. 오늘 공연에서 그 노래들을 들으니 눈물이 났다. 마음속으로 뜨겁게 따라 불렀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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