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량 아닌 차값’으로 자동차세 매기겠다는 윤석열 정부, 미국과 사전 협의 안해
지난달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자동차세 개선 방안과 관련해 산업통상자원부가 이에 대한 사전검토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자동차세를 개편하기 위해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이 필수라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에 대한 고민 없이 섣불리 정책을 추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실에 따르면, 자동차세 과세구조 개선 추진 방안 발표 전 미국과의 사전 협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 산업부는 “미국과 협의를 진행한 바 없음”이라고 답했다. 해당 개선안이 한미 FTA에 위배되는지에 대한 검토 여부와 관련해서도 “향후 구체안이 마련되면 면밀히 검토할 계획”이라고 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달 배기량을 기준으로 하는 현행 자동차세 과세 기준을 차량 가격 등으로 변경하는 내용의 개선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이 개선안이 한미 FTA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2011년 한·미 FTA 협상 당시 배기량을 기준으로 5단계 세율 구간을 운영 중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배기량이 큰 미국 대형트럭에 높은 세율의 자동차세가 부과된다는 점을 들어 사실상 ‘관세장벽’이라며 고율 구간 삭제를 요구했다.
결국 세율 구간은 3단계로 축소됐고 이를 한국 임의로 수정할 수 없도록 됐다. 한미 FTA 제2.12조 3에는 “대한민국은 차종간 세율의 차이를 확대하기 위해 차량 배기량에 기초한 새로운 조세를 채택하거나 기존의 조세를 수정할 수 없다”는 문구가 삽입됐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미국 측과의 사전 협의는 물론 위배 소지와 관련한 사전검토를 하지 않은 셈이다. 대통령실은 지난달 행안부와 유관부처인 보건복지부·여성가족부에는 자동차세 과세 구조 개선과 관련한 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지만 산업부는 권고 대상에서 빠졌다.
그간 한국의 자동차세 개편 시도는 번번이 좌초됐다. 행안부는 2010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나 연비를 기준으로 과세기준을 바꾸는 방안을 만들었으나 한미 FTA 문제 때문에 무산됐다. 2015년에도 당시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이 차값으로 세금을 매기는 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폐기됐다.
현재 21대 국회에서도 이용우·장경태·구자근 의원이 비슷한 취지의 법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정부는 지난 2월만 해도 이 법안에 대해 “한미 FTA 영향 등을 고려해야 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입장이 바뀐 것은 관련 커뮤니티 등에서 자동차세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다. 대통령실이 이 문제를 국민참여토론 주제로 선정했고 결과가 나오자 다음달 과세 주무부처인 행안부에 개편 추진을 권고했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는 “수입 대수도 많지 않던 대형 트럭 때문에 세율을 깎고 그걸 수정조차 못하게 했던 미국이, 배기량이 아닌 차값을 기준으로 자동차세를 매기는 방안을 수용해 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며 “테슬라 전기차의 경우 현행 배기량 기준으로는 세금을 거의 내지 않는 데 반해 차값으로 기준이 바뀌면 세금이 껑충 뛴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부의 사전검토나 미국과 사전 의견 교환 등 실현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한 뒤 발표했어야 할 정책”이라고 말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로 수입되는 테슬라 전기차는 올 1월부터 8월까지 동안에만 4544대에 달한다.
강병원 의원은 “기술 발전과 과세 형평성, 조세주권 차원에서도 자동차세 과세기준 개편이 필요하다”면서도 “한미 FTA 문제를 넘지 못해 국민들께 실망만 줬던 이명박 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는 이미 논의됐던 개편안만 반복할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사전협의 등을 바탕으로 그간 넘지 못했던 장벽을 어떻게 넘을지 실질적 방안을 발표해야 할 것”이라 말했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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