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휴민트, 상상력, 그리고 정치…'정보재앙' 부른 이스라엘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논설위원 = 9·11 테러가 일어나기 한 달 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책상 위에 올라온 대통령 일일 보고서.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는 제목이었다. 보고서를 쓴 CIA 분석관들은 테러가 현재 진행형이고 심각하다(current and serious)라는 점을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보고서를 읽은 부시 대통령은 익히 알던 대로 '알카에다는 위험하구나'라는 정도로 여기고 넘어갔다. 훗날 정보계에서는 보고서에 담긴 경고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테러가 일어날 것'이라는 식으로 특정돼있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실무적 보고만의 문제였을까. 9·11 조사위원회는 "9·11 테러를 막지 못한 것은 (지도자들의) 상상력의 부족이었다"고 최종 결론을 지었다.
이스라엘은 대외정보기관인 모사드(Mossad)와 내무 첩보기구인 신 베트(Shin Bet·샤바크), 그리고 방위군(IDF) 산하 군 정보기관인 아만이 세계 최고의 방첩 활동을 펴는 것으로 유명하다. 접경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공격 가능성은 상수였다. 그럼에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50년 만에 들이닥친 하마스의 전방위 급습을 막아내지 못했다. 9·11 테러와 같은 재앙 수준의 총체적 정보 실패였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에밀리 하딩 연구원은 이를 비행기 충돌사고에 비유했다. 단순히 한 가지 일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지며 재앙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정보 수집과 분석, 평가, 공유, 보고, 판단, 대응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구멍이 뚫려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정보기관들은 통상 시긴트(신호정보), 휴민트(인적정보), 이민트(이미지 정보)라는 세 가지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한 뒤 종합적으로 분석·평가한다. 시긴트와 이민트 역량은 첨단 기술력에 좌우된다. 교묘히 전화기나 컴퓨터 시스템에 접속해 적국의 정보를 빼내는 이스라엘의 능력은 전설로 불릴 정도다. 그런 이스라엘이 이번에 완전히 허를 찔렸다. 하마스가 첨단 사이버 감시망을 피하려고 '석기시대' 방식으로 기습을 준비했다는 게 소식통들의 얘기다. 하마스 간부들은 전화기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고 전파 자체가 차단된 방이나 지하 공간에서 모의했다고 한다. 뒷배인 이란이 하마스의 사이버 방첩을 도왔다는 보도도 나왔다. 정보 수집의 치명적 결함은 휴민트의 부재에 있었다. 이스라엘이 수년간 봉쇄정책을 이어가면서 가자지구는 '창살 없는 감옥'으로 변했고, 인적 정보망은 사실상 붕괴됐다고 한다. 하마스가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장악한 빅 브라더 체제 속에서 가자 내부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스라엘로서는 캄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패인은 '상상력의 실패'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가능한 적의 공격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이에 물 샐 틈 없이 대비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외신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내부 정보기관은 물론 이집트 등 주변국 정보기관으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첩보와 경고 사인을 받았지만 이를 임박한 위험으로 여기지 않았다. 특히 하마스가 불도저로 철의 장막으로 불리는 스마트 펜스를 끊거나 로켓 방어시스템 '아이언 돔'을 갖춘 이스라엘을 향해 수천발의 로켓을 쏟아내는 식의 공격을 할 것으로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이 9·11 테러 당시 테러리스트들이 민항기를 미사일로 둔갑시킬 가능성을 간과한 것과 같은 우를 범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동맹인 미국과의 정보공유가 예상만큼 원활치 못했던 점도 거론된다. 2015년 미국의 이란 핵합의 이후 불편해진 양국 사이에는 최근 들어 정보공유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관측도 있다. 미군 고위관계자는 NBC 방송에 "미국은 하마스의 움직임을 추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내부의 정치 불안이 정보역량을 약화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역사상 가장 우경화됐다고 평가되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의 부패 혐의를 벗기 위해 사법개혁을 밀어붙이고 이에 반기를 드는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을 지난 3월 전격 해임한다고 했다가 취소하는 등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 이스라엘 전역 150여개 지역에서 수십만명이 참여한 반정부 시위가 10개월째 이어졌고, 하마스는 이런 정치적 혼란을 틈타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하마스에 집중됐어야 할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의 신경이 시위로 인해 분산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극단의 정치와 사회적 갈등 증폭이 나라의 정보역량까지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한다.
rh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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