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로 부를 쌓은 원주민의 비극···‘플라워 킬링 문’[리뷰]
디캐프리오·드니로… 스코세이지 페르소나 출연
1920년대 북미 원주민 오세이지족은 세계에서 제일 부유했다. 이들을 돈방석에 앉힌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들에 의한 강제이주였다. 오랜 터전 캔자스를 떠나 정착한 오클라호마의 척박한 땅에서 ‘검은 황금’ 석유가 솟아난 것이다. 순식간에 부를 얻은 원주민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자신들을 ‘야만인’이라 깔보던 백인 하인과 기사의 고용주가 된다.
이즈음 오세이지족들의 의문의 죽음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머리에 총을 맞아서, 누군가는 기차에 치여 죽는다. 사망자가 수십명에 이르는데 조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오세이지족을 죽이는 것보다 개를 발로 차는 쪽이 유죄를 받기 더 쉬운” 시대였다.
미국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플라워 킬링 문>(19일 개봉)은 20세기 초 석유로 갑작스럽게 막대한 부를 쌓은 원주민들에게 닥친 비극을 그린 실화 바탕의 영화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살아 돌아온 어니스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오클라호마의 목장주인 삼촌 윌리엄(로버트 드니로)을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윌리엄은 이곳에서 ‘킹’이라 불리는 인물. 오세이지족 언어를 구사하며 그들의 ‘친구’를 자처하는 실세 중 실세다. 어니스트에게 일자리를 준 윌리엄은 오세이지족 여성 몰리(릴리 글래드스톤)와 잘해보라 말한다. “결혼만 하면 그 재산이 우리 게 되는 거야. 남자로서 도전해볼 만하지 않나?”
당시 가난했던 백인 남성들은 오세이지족 여성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꿨다. 어니스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몰리는 자신에게 접근해온 어니스트가 돈을 노린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와 사랑에 빠진다. 어니스트는 몰리를 사랑하지만 몰리의 자매들을 죽여 재산을 독차지하자는 삼촌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한다.
논픽션 작가 데이비드 그랜의 베스트셀러 <플라워 문>(2017)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100년 넘게 미국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극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고 평가받는다. 책을 읽은 디캐프리오가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영화화를 제안했다.
원작이 오세이지족 연쇄 살인 사건과 함께 이를 계기로 탄생한 전국적 수사체계(FBI)를 보여줬다면 영화는 오세이지족을 향한 백인들의 폭력과 교묘한 착취를 그리는 데 집중한다. 영화 속 백인들은 오세이지족에게 밀주를 공급해 알코올중독에 빠지게 하거나, 금치산자라는 족쇄를 채워 백인 후견인을 두게 한 뒤 예금 인출을 제한한다. 현대적 사법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전 미 중서부의 혼란은 오세이지족을 촘촘하게 옭아맨다. 케이크같이 달콤한 백인들의 음식마저 이들이 당뇨로 일찍 세상을 뜨게 만든다.
야만족이라 멸시받은 원주민들이 통과한 야만의 시대를 적나라하게 그린 끝에 관객이 받는 것은 ‘무엇이 진짜 야만인가’라는 질문이다. 피와 폭력 위에 세워진 미국의 어두운 역사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감독의 대표작 <갱스 오브 뉴욕>을 떠올리게 한다. 오세이지족의 전통 의식을 부감으로 찍은 마지막 장면이 이들에게 바치는 거대한 제의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지난달 타임지와 인터뷰하며 “언젠가부터 내가 백인 남성들에 관한 영화만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 사실이 무척 염려됐다”고 말했다. 이런 성찰은 여든의 감독이 영화를 계속 만들게 하는 동력이면서 그의 작품이 결코 낡지 않는 이유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두 인물 어니스트와 윌리엄 역은 스코세이지 감독의 신·구 페르소나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했다. 각각 6번째와 10번째 출연한 스코세이지 영화다. ‘연기 귀신’인 두 배우는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인물 어니스트와 돈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추악한 인물 윌리엄을 능숙하게 표현한다.
몰리 역의 릴리 글래드스톤은 두 명배우에게 밀리지 않고 자신만의 빛을 낸다. 현명하고 위엄 있는, 그러나 가족과 건강을 잃고 약해져가는 여성 몰리를 인상적으로 연기한다. 영화가 지닌 사실감의 많은 몫이 그에게서 나온다. 글래드스톤은 북미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블랙피트의 후손이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몰리를 비롯한 극 중 44개 배역을 원주민 부족 배우에게 맡긴 데 이어 오세이지 공동체에게 자문하며 ‘화이트워싱’의 싹을 자른다. 원주민의 적극적 참여는 1920년대 오클라호마 원주민 보호구역의 실감 난 재현에도 기여했다.
영화가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을 때 뛰어난 만듦새 외에 3시간25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화제가 됐다. 영화가 지나치게 길다는 지적을 감독은 영화광다운 한마디로 일축했다. “오, 제발요. 여러분은 TV 앞에 5시간도 더 앉아 있잖아요? 영화에 대한 존경을 보여주시오.”
영화의 제목 ‘플라워 킬링 문’(꽃을 죽이는 달)은 오세이지족이 5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키 큰 식물이 번식하며 빛과 물을 독차지해 작은 꽃들이 생명력을 잃는 때라는 의미로 오세이지의 비극적 운명을 은유한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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