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판사가 성폭행범 두둔?

진선민 2023. 10. 1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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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질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요. 피고인이 나이가 어린데 합의해 줄 수 없나요?"

성폭행 피해자의 가족에게 이 말을 한 사람, 가해자의 가족도 변호사도 아닙니다.

재판을 맡은 판사입니다.

이 사건을 조사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재판장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피해자 측의 인권이 침해된 사실을 인정하고, 법원행정처장에게 대책 마련을 권고했습니다.

결정이 나오기까지, 가족들은 외로운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 지적장애인 성폭행한 17세 소년… 판사는 "피해자만 힘든 거 아냐"

2021년 10월, 강간치상 혐의로 기소된 17살 정모 군의 결심 재판이 열린 대구지방법원.

정 군은 SNS에서 알게 된 지적장애인 피해자를 유인해 공원 화장실에서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정 군을 직접 마주하기 두려워하는 피해자 대신 언니 A 씨가 그날 법정을 찾았습니다.

사건 후 피해자는 수차례 자살을 시도해 한때 폐쇄병동에서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고, 가족 모두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었습니다.

A 씨는 정 군을 엄벌해 달라 호소했지만, 생각지 못한 말이 돌아왔습니다.

판사는 "피해자 가족도 힘들겠지만 피고인 가족도 힘들다. 그것도 알아야 한다"면서 "피고인 나이가 어린데 합의해 줄 수 없느냐"고 했습니다.

합의 의사가 없다고 했는데도 "돈 받아서 동생이 좋아하는 걸 할 수 있게 해 주면 좋지 않겠냐"면서 "민사 소송을 하려고 합의를 안 하느냐. 소송 비용만 들고 보상 금액이 적은데 지금 합의해 주면 더 많은 금액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정 군이 보호처분이나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을 들며 "정말 질 나쁜 애는 아닐 것이다"고 했고, 피해자를 가리켜 "지적 장애인이니까 일반인처럼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란 말도 했습니다.

"속으로 계속 '무슨 헛소리야'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생이 정신과 약을 하루에 열 알이 넘게 먹고 힘들어하는데, 애 살려보겠다고 (엄벌해 달라) 하는 건데… 말 몇 마디로 우리를 다시 죽음에 내모는 거예요."
- A 씨

재판을 마치고 나온 A 씨는 트라우마 증상을 보여 응급실로 이송됐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 선고 날, 재판부는 정 군 사건을 소년부로 송치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검찰은 징역 6년의 중형을 구형했지만, 형사처벌을 하는 대신 소년 보호처분을 받도록 선처한 겁니다.

가해자가 감옥에 가기만을 바라고 있던 피해자에게 가족들은 차마 선고 결과를 알리지 못했습니다.

■'부적절한 발언 없음' 결론 낸 사법부… 인권위가 제동

A 씨는 이듬해 7월 법정에서 판사가 한 말로 2차 피해를 입었다며 대법원에 진정을 넣었습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나온 대법원 윤리감사관실의 결론은 "부적절한 언행은 없었다"는 것.

"소송지휘권의 범위를 벗어난 재판진행이나 부적절한 언행을 확인할 수 없었음."
- 대법원의 민원 회신, 2022년 8월

그러나 인권위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인권위 침해구제 1위원회는 지난 8월 진정인과 해당 판사, 참고인의 진술과 공판 조서를 종합하면 문제의 발언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보고, 법원행정처장에게 후속 조치를 권고했습니다.


해당 판사는 법관의 재판은 인권위의 조사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재판 절차나 소송지휘에 필요한 발언이 아닌, 당사자를 모욕하거나 명예를 실추하는 발언·부당한 부담을 주는 발언은 허용할 수 없다는 판단입니다.

"결정문을 읽는데 손이 덜덜 떨렸어요. 저한테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니라'고, '그 사람이 너한테 잘못된 말을 한 게 맞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 A 씨

■인권위 권고 후 법원은… '막말 판사' 방치하는 사법부

하지만 인권위의 권고에도 법원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에 권고에 대한 입장과 후속 조치를 문의한 결과, "해당 법관이 소속한 법원에 관련 내용을 통보해 처리하도록 했음을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판사의 '막말'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형사재판 피고인이든 피해자든, 민사소송의 원고든 피고든, 판사의 손에 운명이 달린 재판 당사자들 입장에선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렵습니다. 더구나 법원이 관련 민원에 소극적이다 보니 피해를 구제받기도 쉽지 않습니다.

대법원이 더불어민주당 김영배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법관의 부적절한 법정 언행과 관련해 대법원 윤리감사1심의관실에 접수된 진정은 모두 17건.

군 성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의 반응이 너무 과하다"고 했다는 판사(대구지법), 결심 재판 당일 바로 선고를 하면서 피고인에게 "올라갈 차비도 없으면서"라며 무시했다는 판사(서울남부지법)에 대한 진정 사례가 있었습니다.

판사에게 "소장 내용이 한심하다. 개판이다"고 혼이 났다는 민사재판 변호사(서울남부지법)와 증인신문 때 손을 들고 질문할 기회를 요청했다가 "야, 손 내려"라는 말을 들었다는 피고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17건의 진정 모두 '부적절한 언행을 확인할 수 없다'고 결론 내 단순 종결됐습니다. 주의 조치나 징계 청구로 이어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막말 판사', 정말로 없는 걸까요. A 씨는 말합니다.

"그런 말을 해도 '문제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공범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말을 하면 인권위 결정이든 언론 보도든 잘못이 지적되고, 귀찮아질 거라는 걸 판사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법정에서 하는 말에 훨씬 신중해질 테니까요."
- A 씨

대법원은 "참여관 등을 상대로 한 조사와 변론조서 및 법정녹음 확인 등 조사절차를 거쳐 부적절한 법정 언행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며 "진정·청원 및 그 처리결과는 외부인사가 절대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법원 감사위원회의 실질적인 심사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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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민 기자 (jsm@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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