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가 품은 세계 안의 세계
#파리상업거래소 #피노컬렉션 #아틀리에데뤼미에르 #마레지구 #오가타파리 #피에르상
●그 회장님의 소장품이라면
최고의 미술 컬렉터와 최고의 건축가가 만났다. 다시 말하면 멋진 공간과 주목받는 예술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2021년 현대미술관으로 변신한 파리의 옛 상업거래소,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에 다시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유다. 이 미술관 설립의 토대가 된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은 구찌, 생로랑, 보테가 베네타 등 명품브랜드를 소유한 케링 그룹의 회장이자 슈퍼컬렉터인 프랑수아 피노가 소장하고 있는 5,000여 점의 미술품을 지칭한다. 안도 다다오에 의해 18세기 프랑스 건축물은 대형 노출 콘크리트 실린더를 품은 원형의 전시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실린더 구조물의 안치로 대형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면과 퍼포먼스를 진행할 수 있는 중앙 공간, 그리고 이 건축물의 백미인 천장 프레스코화(5개 대륙의 교역 장면이 그려져 있다)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공중 통로까지 한번에 해결한 걸 보니, 과연 거장 건축가의 한 수다.
파리의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기획전의 타이틀은 '폭풍우(AVANT L'ORAGE)'다. 작가들의 메시지가 기후변화에 집중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전시 기획자는 '자연의 연약함을 마주 보게 하는 전시'라고 소개했지만, 무한 루프 같은 원형 회랑을 돌며 머리카락과 섬유, 빗물과 나뭇가지, 벌레와 흙을 사용한 작품을 거듭 만나다 보니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연을 탕진해 버린 지구라는 '상업거래소'는 지금 '폭풍우' 같은 부도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경고다.
●몰입은 좌식이었다
피노 컬렉션이 끊임없는 원운동을 요구했다면, 디지털아트센터인 '아틀리에 데 뤼미에르(Atelier des Lumiere)'는 관람객을 중심으로 작품이 돌아가 주는 친절한 곳이다. 이미 제주 '빛의 벙커'를 방문했다면 익숙한 경험일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훈데르트바서, 고갱, 고흐 등 거장들의 명화가 색과 빛으로 벽과 천장에 투사된다. 파리 시민들에게 영상과 음악에 완전히 압도되는 몰입형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선택된 장소는 파리 11구에 남아 있던 산업유산인 옛 주물공장이었다.
제주도 '빛의 벙커'와 관람 경험이 사뭇 달랐던 이유는, 제주에서는 앉을 자리가 부족하고 관람객이 계속 이동했다면, 파리는 앉을 공간이 많기도 하고, 중간에 입퇴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앉은 자세로 관람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이 140대의 고화질 프로젝터와 50대의 스피커가 쏟아 내는 빛과 색채, 음악에 기대어 세상 모든 근심을 놓아 버리기 좋은 환경. 혼자였다면 아주 오래 죽치고 앉아 몰입의 기쁨에 푹 빠져 들었을 것이다.
●이 식당, 재미지고 개미지네
프랑스어로만 대답하고, 프랑스 요리만 최고로 친다는 프렌치의 고집은 옛말이다. 오가타 신이치로와 피에르 상 보이에. 퓨전 요리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두 사람은 모두 파리에 자신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차이점은 있다면 오가타 신이치로는 일본을 대표하는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이고, 피에르 상 보이에는 파리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셰프라는 점인데, 지금 파리의 셀럽들이 가장 애정하는 레스토랑이라는 점에서 둘은 다시 만난다.
오가타 파리(ogata paris)는 파리 트렌드세터들이 가장 사랑하는 동네인 마레지구에 자리 잡았다. 여전히 핫한 마레지구는 누군가의 에코백에서 본 그 이름, '메르시', '오에프알(ofr)' 같은 편집숍과 독특한 레스토랑이 골목마다 숨어 있는 곳이다. 마레 지구의 고풍스러운 빌딩을 선택한 오가타 신이치로는 2020년 자신의 세계를 파리로 이식했다. 참고로 그는 코스메틱 브랜드 이솝이 일본 내 5개 매장을 맡겼긴 디자이너고, 하얏트 계열의 안다즈 도쿄 호텔에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화과자 브랜드 '히가시야', 녹차 브랜드 '사보'를 통해서도 증명한 신이치로의 식문화에 대한 열정은 오가타 파리의 테이블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사실 실내가 너무 어두워 뭐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잘 몰랐는데, 분명한 것은 모든 메뉴가 일본미를 근간으로 전혀 새로운 미식 경험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달콤한 매실주가 페어링을 도왔다.
피에르 상 보이에는 루이 비통의 선택을 받은 셰프다. 지난해 서울에서 '피에르 상 at 루이 비통' 팝업 레스토랑이 운영되었다지만, 그때는 몰랐다. 대신 파리에 운영 중인 5개의 레스토랑 중에서 파리 11구 오베르캄프에 위치한 피에스 상 레스토랑(Pierre Sang in Oberkampf)을 찾았다. 좁은 입구로 들여다봐도 이미 발 디딜 틈 없는 카운터 좌석을 통과해 내려간 지하는 조명이 어두운 와인저장소 같았다. 독특한 것은 서빙 방식이다. 메뉴는 선택 없이 단 하나. 6가지 요리가 나오는 코스메뉴다. 요리가 하나씩 나오고 접시가 비면 블라인드 테스트가 시작된다. "지금 드신 요리에서 무슨 재료가 느껴지시나요?" 색이 붉으니 토마토일 것 같은데 고추장과 수박이라는 식이다. 정답을 맞히기란 쉽지 않고, 그 답을 수긍하기도 쉽지 않지만, 오묘한 그 맛이 (남도식 표현으로) 재미지고 개미지다.
글·사진 천소현 에디터 강화송 기자 취재협조 비스터 콜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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