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 자매 JMT 도전기 下] 이발소 풍경 포기한 이유 "산이 이사 가는 건 아니니까"
미국 캘리포니아의 백두대간, 시에라네바다산맥은 몇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산중 호수로는 북미에서 가장 큰 타호호수Lake Tahoe가 있다.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산 휘트니Mount Whitney(4,421m)를 품고 있다. 650km가 넘는 이 산맥의 동쪽을 이스터 시에라로 부른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잡스가 가장 사랑했던 산맥이다. 산이 높고, 깊고, 험하기에 1912년까지도 미지의 지역이 존재했던 곳이다. 존 뮤어 트레일JMT은 이스턴 시에라 산과 호수를 따라 이어진다. 수채화 속을 걷는 화첩기행이 되는 것이다.
비숍패스를 통해 JMT로 진출을 시도하다 눈에 막혀 고생만 하고 철수한 정씨 자매. 그러나 "다 계획이 있다"는 언니 태미김 리더는 JMT 종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JMT 때문에 오매불망 한국에서 날아온 동생 때문이리라. 야영장에서 철수한 우리는 차로 모스키토 플랫 트레일 초입Mosquito Flat trailhead으로 이동했다. 주차장 높이가 자그마치 3,139m. 동쪽 시에라산맥 수많은 등산로 입구 중에 가장 높은 위치였다.
트레일 입구에서 종주대장 태미김이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한다. 이곳에서 시작해 모노패스Mono Pass를 넘어 JMT를 만난다고. 우리는 이미 산속에서 3일을 야영했다. 과연 2박3일 남은 시간에 요세미티공원까지 종주를 끝낼 수 있을까. '계획이 있다'지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눈이 가장 큰 난관이었지만 기온이 올라가며 눈 녹은 물이 또 다른 두려움으로 떠올랐다. 다리는 거의 떠내려갔고 강을 건널 수 없으니 우회하라는 산림청 경보도 있었다.
우리는 물이 불어 강이나 큰 계곡은 통행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렴 어때 '물 철철' 덕분에 여태 보지 못했던 풍경을 만날 텐데. 스티브잡스가 걸어 놓았던 안셀 아담스Ansel Adams 사진에서도 만나지 못한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기회. 그러니 무조건 좋다. 트레일 곁에 흐르는 계곡 물살이 정말 차갑고 세차다. 해발 4,000m를 넘나드는 산맥에 쌓인 눈 녹은 물이기에 그렇다.
존 뮤어 황야로 들어선다는 표지판을 지나며 당일 트레커를 만났다. 그들과 동행하는 개들도 '개 배낭'을 메었다. 자신들이 먹을 식량과 물을 넣은 배낭. 개 배낭을 멘 귀여운 모습과 헤어져 우리는 고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호수가 존재하고 거대하고 험준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계곡. 이름은 리틀 레이크 밸리 트레일Little Lakes Valley Trail. 이 계곡엔 수십 개의 호수가 존재하지만 이 트레일은 그중 멋진 8개 호수를 이어가고 있다.
이발소 그림을 만나다
바야흐로 눈앞에 '이발소 그림'이 펼쳐진다. 내 기억 속에는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서 전쟁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이 저장되어 있다. 그곳엔 이발소 그림을 제작해 파는 그림 가게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이발소에 주로 걸렸던 과장된 그림은 값싸고 천박한 키치Kitsch 예술로 표현했었다. 나는 그런 해석에 반대한다. 정감어린 한국식 민화에 가까운 그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눈앞에 이발소 그림이 파노라마처럼 병풍치고 있으니 내 말이 맞다.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모간패스MoganPass와 모노패스로 나뉜다. 모간패스 쪽으로는 호수를 이어가는 아름다운 트레일이다. 그러나 모노패스는 가파른 암벽을 지그재그로 오르는 나무 하나 없는 땡볕일 것이다. 그러나 존 뮤어 트레일을 만나려면 이 길을 선택해야 한다.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모노패스에서 하산 중인 등산객을 만났다.
키 큰 배낭을 보니 야영 준비가 확실한 산악인이다. 트레일 상황을 물어보니 고개를 단호하게 흔든다. 정상 근처 루비Ruby호수에서 야영하려고 가다가 눈 때문에 철수 중이라는 말. 조금 더 올라가면 트레일을 덮고 있는 눈밭을 만나는데 표면이 얼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경고였다.
뒤 따라 온 대장 태미김도 그 이야기를 듣더니 간단히 포기한다. 포기하는 변명치고는 명언이다. "산이 이사 가는 거 아니니까 내년에 오면 된다"는 말. 옳은 판단이다. 그 대신 우리는 모간패스 쪽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정말 이발소 그림이다. 빙하가 깎아 만든 협곡. 빙하가 만든 수많은 호수와 산에서 내려오는 '물 철철' 계류들. 물 천국을 만난 메도Meadow, 즉 초원엔 야생화가 가득 차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뒤로 하얀 눈이 쌓인 채 버티고 선 시에라산맥의 웅혼함. 맥 레이크Mac Lake에는 어느 낚시꾼이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 그가 던지는 낚시 줄이 포물선을 그리며 맑은 호수에 잠기기 전 작은 무지개를 만든다. 모든 게 이발소 벽에 걸린 그림처럼 평화로운 풍경이다. 태미김은 리더로서가 아닌 언니로서 동생 정태심씨를 챙기는 애틋함이 보인다. 내가 볼 때는 동생 체력이 더 나아 보였으나 이래저래 걱정은 언니가 훨씬 많다. 직접화법으로 말한다면 차고 넘치는 걱정이라고나 할까.
낡은 나무다리를 건너며 하트 레이크로 가는 길은 정말 목가적 풍경이다. 너른 목초지에 사방에서 흘러드는 맑은 냇물들의 돌돌 거리는 물소리까지 상큼하다. 정겨운 트레일은 작은 고개로 이어지고 있다.
다섯 번째로 박스 레이크Box Lake를 만났다. 수심 깊은 호수이기에 그런지 물색이 검었다. 산들바람이 만드는 물비늘이 햇볕을 톡톡 튕겨내는 호수. 우리는 전망 좋은 곳에 앉아 다리쉼을 했다. 슬쩍 내가 말했다.
맏언니가 짊어지고 온 시간들
"동생 분, 언니 잔소리 짜증나지 않나요? '물 조심해. 돌 조심해. 눈 조심해' 하는 잔소리 말입니다."
나는 웃자고 했던 말인데 정태심씨 대답이 퍽 진지하다. 공연히 멋쩍어졌다.
"저는 막내이기에 잘 알아요. 세상의 모든 맏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누군가 함께 나누어 짊어질 수 없는 부담을, 맏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하잖아요. 미국에서 치열하게 살아준 맏언니의 그 세월에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잔소리를 핑계로 웃겨 보려던 내가 머쓱하다.
"이번에 미국 오면서 언니와 많은 상의를 했어요. 올해는 존 뮤어 트레일에 눈이 엄청나게 내렸잖아요. 그 상황을 매일 체크하며 언니가 걱정을 많이 했어요. 걱정 많은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름 훈련도 많이 했고요. 언니는 원래 조심성이 많아요."
아하!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넘쳤던 잔소리도 산행을 꿈꾸는 달콤함이기에 이겨냈다는 말. 하기야 산악인들의 상투적인 말에 '과정을 중요하게, 과정을 달콤하게'라는 말이 있긴 하다. 준비 기간은 체력이 생략되는 상상이기에 달콤할 수도 있다. 비행기 티켓 또는 존 뮤어 허가증 같이 준비한 게 많아 취소할 수 없었겠다.
산행을 진행하지만 태미김은 대장으로서 나름의 마음고생이 있었을 것이다. 이번 시에라산맥 원정산행이 정씨 가문의 영광이라는 자매는 별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 맞다. 한국과 미국에서 각자의 삶을 살다보니 함께할 시간 갖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게 맏이로서는 미안하고 막내로서는 그리웠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런 정을 나누는 장소가 험하기로 소문난 시에라네바다 눈 덮인 산속이라니.
미국이 존 뮤어에게 헌정한 광야
요세미티를 국립공원으로 만든 사람이 존 뮤어John Muir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환경단체 시에라클럽을 만든 사람도 그다. 산에서 흔히 사용하는 '시에라컵'도 여기서 나왔다. 시에라클럽 자체도 이 산맥이름을 딴 것. 미국은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이 야생의 땅을 존 뮤어 광야John Muir Wilderness로 이름 짓고 그에게 헌정했다.
시에라클럽 회원들은 존 뮤어가 죽자 이스턴 시에라산맥에 358km에 달하는 산길을 만들었다. 요세미티에서 본토 최고봉 휘트니까지. 그게 바로 존 뮤어 트레일JMT의 탄생이다. 존 뮤어는 말한다. "자연과 함께 산책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는다"라고. 평생에 걸친 산행에서 얻은 미국 판 산신령 같은 말이다.
"정말 그 말이 맞네요. 그동안 JMT를 많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봤어요. 그런데 직접 보고 걷는 게 훨씬 더 사실적이고 감동이네요. 진짜 위대한 풍경입니다."
정태심씨는 지금 존 뮤어 황야 깊은 산속에 있는 게 감사한 듯 보인다. 누구나 이런 자연에 녹아들면 그런 감정이 될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힘든 발품을 팔아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그게 공평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산행이 힘들어도 저 언덕을 넘어 서면 또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가 발걸음보다 앞서는 곳. 낮은 고개를 향한 숲 속에 나무 가지가 만든 터널이 보였고, 그 둥근 터널 끝에 하얀 눈을 쓴 장벽이 서있다. 고개를 올라서자 드디어 롱 레이크Long Lake가 나타난다. 호수가 길면 모두 롱 레이크가 되는 모양. 이미 고도는 4,000m에 가깝다.
호수를 에워싼 데이드Dade, 애보트Abbot 산 등 높이 4,000m가 넘는 봉우리들. 그 산이 흘려준 물을 온전히 가두고 있는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시에라 산마루가 성큼 가깝다. 산 위에 쌓였던 눈이 천천히 녹으며 호수로 흘러온 덕분일까. 그냥 마셔도 될 성싶은 투명한 물색은 예쁘지만 얼음물이다. 이 높은 고도에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빙하호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시에라의 축복이다. 이 높이의 고산호수라면 하늘 호수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정말 호수는 파란 하늘을 온전히 담고 있다.
정상은 단지 절반 거리일 뿐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트레일 징검다리는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 무리해서 건넌다 해도 이후엔 깊은 눈밭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나나처럼 긴 호안을 따라 이어지는 눈밭에는 발자국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태미김 대장은 다시 멈췄다. 내 느낌에도 여기까지였다. 물에 젖어 개울을 통과하는 건 쉽다. 그럴 수는 있지만 눈밭에서 GPS에 의지해 산행을 진행한다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온 사람도 우리뿐이었다.
'다 계획이 있는' 태미김 대장이 어디서인가 들어 본 말을 한다. "존 뮤어 트레일이 이사 가는 거 아니니까, 내년에 다시 오자"고. 이 선언으로 2023년 정씨 자매 존 뮤어 트레일 구간 종주는 실패로 끝. 그러나 누구도 그 실패에 대하여 아쉬운 감정은 없었다. 눈 맑아지는 그동안 산행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 이스턴 시에라 속살을 헤집으며 존 뮤어 광야 곳곳을 누볐으니까.
그동안 동생 정태심씨 코끝이 빨개지는 걸 몇 번 목격했다. 사람은 여러 이유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정태심씨의 눈물은 이유가 없어 보였다. 화가로서 감성이 풍부한 탓인지는 모르나 어쩔 수 없는 풍경 앞에서 찔끔 나오는 눈물. 정태심씨의 느낌은 그런 거였다고 믿는 이유는 드물지만 나도 그런 걸 경험했으니까 그렇다.
태미김 대장이 또 버릇처럼 하산에 대한 걱정이 시작되었다. 눈길, 물길, 부러져 길 막은 나무, 지고 있는 해… 걱정이 산 높이다. 한마디 해 주자. 산행도 끝났는데.
"대장 이런 말 들어봤어요? '정상은 먼 게 아니다. 단지 절반에 불과하다'는 말을. 절반만 내려가면 되는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이 말장난에 무슨 심오한 뜻이라도 있어 보이는지, 정씨 자매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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