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 걸린 '가상 아이돌'을 왜 좋아하냐고요? [K컬처 탐구생활]
편집자주
K컬처의 현안을 들여다봅니다. 김윤하, 성상민 두 대중문화 평론가가 콘텐츠와 산업을 가로질러 격주로 살펴봅니다.
코로나 팬데믹 때 돌림 노래처럼 들은 말이 있다. 다름 아닌 가상 아이돌이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날 수 없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 속에서 발생한 큰 관심이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가상 아이돌이라는 개념 자체에 열광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싶었다. 하기야 열광적 팬덤과 높은 충성도를 바탕으로 하는 아이돌 비즈니스의 최대 매력이자 동시에 최대 리스크인 사람을 대체할 수 있다니. 이 사실만으로도 투자자나 제작자들이 혹할 만한 구석은 얼마든지 있었다. 개념상으로만 봐도 가상 아이돌은 현실 아이돌에 비하면 확실히 품이 덜 들어 보였다. 숙고를 통한 연습생 발탁이나 오랜 트레이닝 과정도 필요 없고 나이 들거나 지치지도 않았다. 끼니나 수면 시간을 보장하지 않아도 되고 '사고'를 치는 멤버도 있을 리 만무했다.
지금 가는 이 길을 아무튼 걸어가 보는 사이 실질적 성과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재 K팝 신(scene)에서 여러 의미로 주목받고 있는 그룹 플레이브가 대표적이다. 플레이브는 남성 5인조로 지난 3월 첫 싱글 '아스테룸'을 발표하고 정식 데뷔했다. 2001년생 리더 예준에서 막내 하민까지 최근 데뷔하는 신인그룹 평균에 적절히 걸쳐 있는 나이나 작곡, 보컬, 댄스 등 골고루 분포된 멤버들의 능력치, 그리고 가상 세계 카엘룸과 지구 사이 존재하는 신비한 공간 아스테룸 출신이라는 확고한 세계관에 이르는 모든 것이 K팝 표준 그 자체다. 단 하나, 멤버들이 2D 형태라는 것만 다르다.
그런 플레이브가 데뷔 반년 만에 거둔 성과는 가상 아이돌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다. 최근 K팝 신에서 가장 바쁜 작곡가 엘 캐피탄과 멤버들이 공동으로 만든 데뷔곡 '기다릴게'는 K팝 팬덤 외 청취자들 사이에서도 ‘곡이 좋다’며 입소문을 탔고, 8월 발매된 미니 1집 타이틀 곡 '여섯 번째 여름'은 K팝 히트곡 기준으로 여겨지는 멜론 톱 100 순위 안에 안정적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 앨범은 발매 첫 주에만 20만 장이 넘게 팔렸다. 이 인기를 토대로 플레이브는 지난달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 아이돌 공연에 초대됐고, 만화책을 찢고 나온 듯한 이들이 전광판에 등장하자 2만여 관객이 응원봉을 흔들며 환호했다. 멤버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영상 통화 팬 사인회 이벤트에는 전 세계 수십 개국의 팬들이 몰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상 인물을 어떻게 사람처럼 좋아하느냐는 근본적 의문만 제거하면 플레이브 인기의 핵심은 사람이 직접 멤버로 활약하는 아이돌 그룹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좋은 노래와 춤, 작사와 작곡은 물론 안무 창작에도 능한 '능력캐' 멤버들, 외모만큼 뚜렷한 멤버들의 개성, 팬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위한 주기적 라이브 방송. K팝 팬들이 손꼽는 '내가 K팝을 좋아하는 이유'를 모두 갖췄다.
탄탄하게 구축된 가상 아이돌 세계관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콘텐츠와 공식도 있다. 사람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기술 오류로 몸에 이상이 생긴 멤버들은 '도와주세요'를 외치며 화면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어제 연습을 너무 많이 했나봐' 같은 농담으로 위기를 수습한다. 이런 '멤버별 렉(오류) 대처법' 모음이 멤버들의 캐릭터를 파악하게 해주는 인기 영상이 될 수 있는 건 가상 아이돌뿐일 테다. 플레이브 멤버 뒤에 이들과 1대 1로 연결된 다섯 명의 실제 '인간'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로 여기는 건 플레이브를 비롯한 가상 아이돌 팬덤의 새로운 덕질 공식이다.
이런 플레이브의 성공은 그동안 인간에 가까운 그래픽 재현에만 힘을 쏟던 기술 활용이 화면 뒤에 있는 존재의 인격과 캐릭터를 돋보이게 만들어 줄 수 있도록 진화한 덕이다. 안무 영상에서 실시간 라이브 방송까지 제작사(블래스트)가 만든 이들의 콘텐츠를 보면, 어떻게 하면 2D 비주얼을 가진 멤버들을 기존의 K팝적 방식으로 대중에게 새로운 인격처럼 다가가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구석구석 느껴진다. 추구하는 산업의 본질을 관통하는 기술 활용법과 탄탄한 서사 구축, 그를 바탕으로 한 팬들과의 애착 형성에 성공한 플레이브가 가는 길이 새로우면서도 당연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김윤하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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