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저녁이 있는 풍경

장미영 소설가 2023. 10. 1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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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영 소설가

밤 산책을 나간다. 저녁을 먹은 뒤라 소화도 시킬 겸 1시간 정도 동네 한 바퀴를 돈다. 물론 주된 목적은 강아지 산책이긴 했다. 덥지도, 그렇다고 춥지도 않은 날씨가 산책하기에 딱 좋다. 재킷 하나 걸치고, 비닐봉지와 휴지, 물통이든 가방을 챙긴다. 녀석이 금방 눈치를 채고 앞장을 선다.

근처 카페에서 분위기 있는 음악이 들린다. 녀석과 한 발, 두 발 함께 걷다 결국에는 노래를 따라 부른다. 달과 별이 친구가 되어주니 괜스레 더 반갑다. 카페며 포차에 모인 사람들이 차나 술, 음식을 먹으며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아기자기한 소품가게와 소담스러운 음식 가게들이 눈과 입을 사로잡는다.

가끔 산책을 나온 견주와 인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친근함에, 데면데면함에, 못 본 척, 미련 없이 뒤돌아서는 퉁명스러움에 웃기도, 시큰둥해지기도 했다. 녀석이 잘 가는 카페에 들러 주인장이 건네주는 간식을 얻어먹고 오면 이래저래 나도, 녀석도 마음이 풀린다. 산책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하지만 매일 웃는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산책 장소가 카페거리와 인접해 있다 보니 늘 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종횡무진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오토바이,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 소리, 끊임없이 내뱉는 젊은 남녀의 욕설들. 도시가 앓고 있다. 게다가 골목어귀마다 삼삼오오, 남녀 가릴 것 없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과 각종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쌓여있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고기 굽는 연기인지, 담배 연기인지 모를 뿌연 미로 속을 뚫고 지나가는 것도, 쾨쾨한 냄새를 맡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의 이유 없는 시비(개를 데리고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화가 났을 것이다)와 어디서 뛰쳐나올지 모르는 길고양이들의 돌발적인 행동(녀석도 간혹 고양이만 보면 덮치려는 버릇이 있다)은 나뿐만이 아니라 녀석에게도 위험하다는 걸 알리는 시그널이었다.

언젠가, 차 밑이나 어두컴컴한 곳에 숨어있다. 갑자기 나타난 길고양이에 녀석이 엉덩이를 물릴 뻔한 적이 있었다. 내가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녀석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녀석의 꼬리가 밑으로 말려있고 호흡이 거칠었다. 서로 놀란 가슴을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생일파티를 한다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은 바람에 동네 시민이 신고를 하기도 했다. 가게 주인과 신고한 아줌마 사이 큰 소리가 오고 가고, 경찰차가 오는 소동이 있고 나서야 조용히 마무리가 됐다. 그야말로 혼돈의 거리였다. 소음과 분노로 들끓는 용광로 앞에 서 있는 기분이 이럴까. 나도, 녀석도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도시에서의 산책은 더 이상 재미진 곳도 아니었고 안전지대도 없었다.

‘저녁이 오면/사람들의 마을에 아름다움의 빛깔이 든다/저녁이 온다고 마을이 저 혼자서 아름다워지랴/한낮의 온갖 수고와 비린 수성들도 잠시 내려두고/욕망의 시침질로 단단히 기웠던 가죽지갑도 주머니 속에 찔러 두고/서둘지 않아도 되는 걸음들로 사람들이 돌아오기도 하는 때/돌아와서 저마다의 창에 하나둘의 등불을 내걸기도 하는 때/그러면 거기. 일순처럼 사람들의 마을로는 아름다움의 물감이 번지기도 한다’. 정윤천 시인의 ‘저녁의 시’ 몇 구절을 적어본다.


도시의 저녁은 네온사인의 빛깔이 든다. 낮밤 가리지 않는 온갖 수고와 비굴함을 견디며 계획에도 없는 음식을 산 뒤 받은 영수증을 꾸깃꾸깃 지갑 속에 넣고는 수고와 비굴함, 허기까지 함께 배불리 채우고는 서둘지 않아도 되는 걸음을 이상하게 서두르고는, 마음에 등불 하나 켜놓지 않은 채로 소음과 다툼과 알 수 없는 연기가 섞여 있는, 미로 속 도심의 저녁을 걷는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저녁의 풍경을 기대하는 건 지금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시대착오적인 기대에 불과한 것일까. 도심의 편리함은 편리함대로 느끼면서도 그 따뜻함을 느끼고 싶어 하는 건 지나친 나의 사치, 지나친 나의 욕망 일 것이다.

저녁이 오면/저녁이 오면/온기 퍼지는 도시의 풍경을 그려본다. 나와 녀석은 어떤 아련함으로 자꾸 뒤돌아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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