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소리] 겨울이 온다는 사실
작은 방의 건너편 창문들이 하나둘 검어질 시간. 열린 창문 너머로 이불을 덮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바람이 조용히 불어온다. 창문 바로 아래의 침대를 지나 책상과 의자 밑의 묵은 먼지를 들춰내고는 꽤 오래 소리 내지 않았던 피아노 앞에 잠시 머물렀다가 방을 빠져나간다. 잠깐 사이에 바람은 다시 제 길을 찾아냈다. 나는 이불 속의 발이 익숙하게 시려오는 것을 느낀다. 옆에 누워 코를 골던 강아지가 바람이 움직이는 기척에 귀를 가볍게 한번 털어낼 때 나는 바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잠든 척하며 얇은 이불을 코 밑까지 끌어덮는다. 말라붙은 나뭇잎들이 스산하게 부딪히는 소리를 내자 강아지는 창밖의 냄새를 맡고는 다시 침대에 고개를 파묻는다. 창문에 박힌 별도 자리를 바꾸었다.
어제는 영화를 매개로 새로운 얼굴들을 만났었지. 영화를 홍보하고 배급하는 방법은 서울이 아니면 배울 기회가 없기에 부산에서 하는 배급 워크숍은 청년들에게 꽤 인기가 있다. 올해로 벌써 세 번째인 이번 워크숍은 부산에 얼마 남지 않은 젊은이들과 만나는 또 다른 기회이기도 하단 말이다. 진로를 고민하는 막중한 마음으로, 혹은 좋아하는 영화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픈 소박한 마음으로 가득 찬 수업은 작은 별이 탄생하기 직전처럼 뜨겁고 찬란했다. 배급 워크숍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제저녁. 어쩐 일인지 지상으로 향한 지하철 계단 끝의 밝은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나를 위한 하루가 한참이나 남아 있는 것처럼 환대해 주었던 좁은 틈의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상실한 마음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사이에 또 태양은 저만치 저물고, 마침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사이에 또 어둠은 이만치 다가와 있었다.
여름엔 슬픈 소식뿐이었다. 협회에서는 연일 성명을 내기 바빴다. 예산 삭감이라는 차가운 단어로 삭제되던 무수한 세계들. 지역 시민의 문화와 예술인의 성장을 돕던 지역 영화문화 활성화 지원사업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고 사회적기업 지원도 중단되었다. 용처를 알기 어려운 어떤 돈은 300억 원이 넘는다는데, 고작 8억 원이라는 예산으로 온 지역이 나누어 영화를 상영하고 제작하고 배급하고 교육하며 그동안 영화 생태계를 만들던 사업은, 지역 일은 지역에서 알아서 하라는 논리 아래 0원이 되었다. 취약계층 일자리를 만들고 수치화하기 어렵지만 소외된 이들을 위해 다양한 예술, 문화적 가치를 위해 힘써왔던 사회적 생태계도 내년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회적 가치와 이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아야 하는 어렵고 힘든 숙명을 지녔던 사회적 기업은 자생력이라는 이름의 처방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할 필요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가을엔 무서운 소식뿐이었다. 누구도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기이한 결정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없다며 누군가는 컴퓨터 모니터에 찍힌 0을 하나씩 지울 뿐이겠지만 그때마다 누군가가 수년 또는 수십 년간 가꿔온 우주는 사라져간다. 또 다른 성명을 준비하고 연대 동의서를 작성해 보아도,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비명은 우리 안에서만 돌고 돌았다. 아마도 내년에는 적어도 지역에서 배급 워크숍도, 상영도, 제작도 문화라는 이름으로는 새로운 동료들과 만날 수 없겠지. 예술의 효과가 본디 그런 것처럼, 예술과 문화를 매개로 서로 다른 세계가 다투지 않고 즐거이 만나고 교감하던 일도 어려워지겠지. 점점 더 각자의 외로운 우주만 남을 것이다. 그러니 어제는 종자를 빼앗겨 버린 서글픈 추수의 현장이다.
어색한 별자리가 새겨진 창문을 꽉 채운 서늘한 바람이 한차례 다시 불어온다. 어디론가 다급하게 달려가며 멀어지던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술에 취한 행인들의 알아듣기 힘든 대화, 집 근처의 쓰레기장 냄새같이 깊은 어둠 속에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던 온갖 사람 냄새를 실어 오던 바람에 무색무취의 서늘함만 남았다. 아마도 한동안은 개운한 아침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잠에서 덜 깬 상태로 샤워를 마치고 오늘이 어떤 하루가 될지 알지 못한 채로 거리로 나서야 할 것이다. 출근길에서 퇴근길까지 어둠에서 어둠으로 이동해야 할 것이다. 불어온 바람이 방을 한 바퀴 돌아 나간다. 이렇게 겨울이 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