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무너져 시를 찾을때, 제목만 보고도 힘을 얻도록”
25년간 400권 만들며 본인도 등단
“시는 외로울때 곁에 있는 친구같아
난 창작보다 무명작가 발굴을 사랑”
2018년 3월 23일 새벽, 암 투병 중이던 허수경 시인(1964∼2018)이 출판사 ‘난다’의 대표인 김민정 시인(47)에게 보낸 e메일이다. 허 시인은 그해 10월 3일 세상을 떠나며 생전 쓴 원고가 들어 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김 시인에게 남겼다. 김 시인은 이 원고로 이듬해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난다)을 펴냈다. 허 시인은 김 시인을 보고 마지막 순간까지 시심(詩心)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99년 등단한 김 시인은 12일 서울 마포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와 만나 “나는 시인이기보다 편집자”라고 했다. 등단 한 해 전부터 잡지사에서 일을 배운 그가 25년간 여러 출판사를 거치며 편집자로서 만든 시집은 약 400권에 이른다. 2011년 1월 첫선을 보인 ‘문학동네시인선’이 대표적이다. 규격부터 디자인, 구성까지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난 이 시리즈는 파격적인 디자인과 눈에 띄는 제목, 참신한 시인 발굴 등을 통해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김 시인은 신인부터 중진까지 시인 50명의 신작을 모아 16일 출간되는 이 시리즈의 200번째 시집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를 마지막으로 이 시인선의 편집과 기획에서 물러난다. 그는 “뒷발에 힘이 생긴 ‘문학동네시인선’은 이제 나 없이도 잘 달린다”며 웃었다.
밤낮없이 원고를 붙들고 살았던 12년을 돌아본 그는 “나를 믿고 원고를 맡겨준 시인들에게 내가 한 약속은 단 하나뿐”이라고 했다. “큰돈 벌어다 주겠단 약속은 못 한다. 다만, 내 것처럼 읽고 또 읽어서 끝내 시인의 마음이 되어 시집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시인과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 그는 “머리가 아니라 몸에 기댄다”고 했다. 원고를 들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창가에 앉아 햇볕을 쬐고, 땅바닥에 앉아 보는 식이다. 김 시인은 “뜨거움과 서늘함, 땀과 눈물이 몸으로 느껴지는 순간 원고에 한 줄기 빛이 내리듯 시집의 제목이 될 문구 하나가 내게 온다”고 했다.
그렇게 찾아온 제목 중 하나가 ‘언니의 나라에선 시들지 않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있던 때였다. 문학동네에 첫 시집 원고를 맡겼던 김희준 시인(1994∼2020)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26세의 젊은 시인은 제목도, ‘시인의 말’도 짓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김 시인은 앞서간 후배의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차가운 병실 바닥에 원고를 펼쳐놓고 달달 외우듯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원고를 7번째 읽던 때였어요. 찬 바닥 위에 놓인 원고가 훈훈한 내복 같아 보였죠. 그때 희준이가 쓴 시 ‘친애하는 언니’의 한 구절(‘언니의 나라에선 시들지 않기 때문,’)이 종이 인형처럼 일어서듯 제게 왔어요. 시인이 이 세상에 있든 없든, 시들지 않는 것이 시의 언어라고 말하듯이요.”
한 줄 제목이 이토록 간절한 이유는 뭘까.
“시는 가장 외롭고 슬플 때 슬그머니 일어나 곁에 있어 주는 친구 같은 것이에요. 모든 것을 잃고 무너져 내린 한 사람이 어느 날 시집을 찾을 때, 제목만 보고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길 바랐어요.”
김 시인은 앞으로도 난다 대표로 계속 책을 만들 예정이다. 그는 “내 시를 쓰는 시간보다 무명 시인을 찾아내 그들의 원고를 읽는 시간을 더 사랑한다”고 했다. 김 시인은 2019년 자신의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문학과지성사)에 쓴 ‘시인의 말’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앞으로도 나보다 이름 없는 시인들을 더 사랑하겠다”는 편집자로서의 다짐일 것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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