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다소 친북? 조총련 홈페이지를 꼭 읽어보라
“북한을 열렬히 사랑하며…” 평양 해외 공작 기관 스스로 입증
野 의원의 조총련 행사 참석은 北 통일전선전술 놀아나는 것
조총련 포섭됐던 문세광의 마지막 고백 “나는 바보였습니다”
2010년 5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자격으로 일본 교토(京都)에 소재한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에서 ‘북한 동향과 한반도 정세 분석’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국제관계학부 나카토 사치오(中戸祐夫) 교수가 직접 방한해 강연을 요청했다. 나카토 교수가 매년 평양을 방문함에 따라 관련 사정을 파악하고, 일본의 대북정책 연구 실태 등을 논의하기 위해 3박 4일 일정으로 교토를 방문했다.
예정된 강연은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설명하며 순조롭게 진행됐다. 소동은 100분에 걸친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 시간에 벌어졌다. 학생들의 단순한 질문이 끝나고 60대로 보이는 인물 두 명이 자기 소개도 없이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난하고 장황하게 친북 성향의 질문을 했다. 북핵 개발은 미국의 공격에 대응한 정당한 자위권의 발동이며 북한의 주체사상은 최고의 이념이고, 한국은 한반도에서 미제의 속국으로 정통성이 없다며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물었다. 20여 분에 걸쳐 요점 정리식으로 답변을 하였으나 그들의 질문은 계속되었고, 사회자인 문경수 교수가 마감 시한을 이유로 2시간에 걸친 강연회를 종료시켰다. 하지만 그들의 반발은 강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학교 만찬장은 물론 저녁에 호텔 숙소 앞에서 기다렸다가 필자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등 광신도처럼 집요하게 접근하였다. 나카토 교수는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교토 지부 소속 조직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들의 집착은 사상범 수준이었다. 교토 체류 3일간은 이들과 숨바꼭질의 연속이었다.
그들이 평양을 가본 적이 있다고 하길래 언제 기회가 되면 서울을 방문해 보고 여러분의 인생은 왜곡된 교육을 받아 오도된 면이 있으니 균형된 시각으로 한반도를 보라는 말로 매듭을 지었다. 하루 이틀간의 대화로 의식을 수정할 단계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심한 민족차별과 멸시를 받다가 조총련이 세운 조선학교에 입학해서 편향된 교육을 받은 재일교포의 굴곡진 인생이었다. 초중고 및 조선대학교로 이어지는 조총련의 교육 기관이 2, 3세대 재일교포들에게 잘못된 역사의식과 세계관을 주입한 결과였다. 조총련계 학교들의 학습조 조직은 민족교육이라는 명분하에 매년 학생들을 이끌고 평양 만경대를 방문하며 김씨 일가의 주체사상 등을 주입시켰다.
오사카, 교토 등 일본 관서(關西)지방은 재일교포들이 다수 거주하여 과거부터 조총련의 활동이 왕성한 곳이었다. 필자의 강연을 방해하라고 조총련 본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으나 리쓰메이칸 대학에서 사전에 행사 방해 금지에 대한 경고를 하여 항의성 질문을 하는 선에서 끝이 난 것이라고 일본 교수에게 후문을 들었다.
조총련은 1955년 5월 북한의 ‘해외 공민단체’로 결성된 이후 일본에서 북한 방문자들의 비자 발급 등 북한대표부 역할을 대행하며 동시에 대남공작기관의 기능을 수행한다. 평양은 한덕수 전 의장과 허종만 현 의장 등 지도부를 원격 조종하여 조총련을 조선노동당 일본 지부로 만들었다. 재일교포들이 파친코, 주류사업 등으로 어렵게 번 수십억엔의 자금을 매년 김일성, 김정일에게 상납했던 역대 조총련 의장, 부의장들은 사망 후 북한의 ‘애국렬사릉’에 매장됐다. 1974년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문세광도 조총련에 포섭됐다. 문세광이 사형되는 날 입회했던 관계자가 전한 그의 마지막 말은 “와타시와 바가데시타(나는 바보였습니다)”였다.
조총련의 가장 큰 과오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이다. 북송 사업은 평양 정보기관에 의해 기획됐으며, 일본에서 북송 사업 실행은 조총련을 통해 이뤄졌다. 조총련은 평양의 지령을 받아 9만3340명의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하였다. 1959년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이른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북송 사업이 시작되었다. 6·25 전쟁 이후 노동력이 부족했던 북한은 재일교포 송환으로 인력을 보충하고자 했고, 일본은 부담스러운 재일한국인을 강제 퇴거시키는 북송에 합의하였다. 1984년까지 25년 동안 총 187회에 걸쳐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의 원산항으로 향했다.
조총련은 ‘북조선은 차별이 없는 지상낙원’이라고 재일교포들을 선동하는 행동대장이었다. 만경봉호에 탑승했던 교포들은 원산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지옥에 도착했다고 탄식을 했지만 이미 배는 일본으로 출항하였다. 편지 검열 등 일본과의 연락이 금지됨에 따라 계속해서 교포들이 조총련의 허언에 속아 생지옥으로 들어갔다. 일본에 남아 있는 교포들은 북한 땅에서 고생하는 친척들에게 매년 상당액을 송금해야 했다. 지금도 많은 당사자가 북한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고 일부는 탈북해서 북한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어떤 야당 국회의원은 지난 9월 초 조총련이 주최한 간토 대학살 100주년 추모식에 보란 듯이 참석하였다.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 행사는 불참하면서 북한을 조국으로 섬기는 조총련을 평범한 시민 단체인 듯 호도하였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거나 무지한 것이다. 다른 야당 최고위원은 1970년 대법원이 반국가단체라고 판결한 조총련을 ‘약간 다소 친북’이라고 한다. 해당 조총련 사이트에 자신들을 홍보하는 문구가 있으니 꼭 읽어보기를 제안한다. ‘북한의 국가적, 법적 보호를 받는 해외동포 단체’라는 설명으로 평양의 해외 공작기관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북한을 열렬히 사랑하며~” 등 평양을 흠모하는 문구로 가득한 강령은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
야당의원의 조총련 행사 참석이 김정은 체제에 대한 진심 어린 짝사랑인지, 대한민국을 무시하는 왜곡된 소영웅주의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속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국회의원 자격으로 조총련 공식 행사에 참여한 것은 국회의원이 평양의 통일전선전술에 동조하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8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 1989년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을 재야(在野) 영웅주의라고 비판했다. 그는 통제되지 않는 친북 운동권 인사들의 무분별한 밀입북 행태에 조마조마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라면 김정은 집권 이후 군사도발에다 경제난으로 벼랑 끝에 몰린 북한 인민들의 비루한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거 재야 인사와 의원들이 평양에 몰래 숨어 들어가 북한을 깜짝 찬양하는 기이한 행태가 향후 조총련 접촉으로 재연될 경우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 등 실정법 위반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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