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시위, 아르헨티나 국민의 자포자기
특파원으로 부임한 첫날 ‘아르헨티나에 오긴 왔구나’ 하고 몸소 실감한 건 공항에 내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서다. 당시 거처로 정해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의 한 아파트에 오후 1시까지 도착하기로 사전에 집주인과 약속했다. 여러 정황상 충분히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교통 정체로 택시가 멈춰 섰다. 정체 원인은 편도 3차로 고속도로를 통째로 막아선 시위였다. 시위대 20여 명 때문에 차들이 순순히 고속도로 밖으로 나가 우회하는 것을 보면서 글로만 접했던 아르헨티나의 강한 집회·시위 권리를 체감했다. 약속 시간에 한참 늦었지만 재밌는 건 집주인 반응이었다. 긴 시간 기다렸을 집주인에게 온몸으로 거듭 사과하자 집주인은 “이 나라에선 자주 있는 일이라 다들 이해하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며 처음 발을 디딘 이방인을 안심시켰다.
첫날부터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날만 그런 게 아니었다. 폭 110m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이자 시내를 관통하는 ‘7월 9일 대로’나 지하철역도 집회·시위 등으로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지난 6월 피파 U-20 월드컵 한국 대표팀의 4강전이 있던 날에는 원주민 시위대가 1번 고속도로를 막아서면서 1시간 남짓 거리를 3시간 만에 도착했다. U-20 월드컵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현 정부가 인기를 얻기 위해 야심 차게 추진한 대회인데도 이를 방해하는 시위대를 경찰이 지켜보기만 했다. 시위대를 마주한 차들은 기껏해야 경적을 몇 차례 울릴 뿐 어찌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택시 기사는 기자에게 “이게 아르헨티나”라고 말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원주민 시위는 평소 자주 벌어지므로 그날 그 장소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르헨티나가 집회·시위를 얼마나 강력히 보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지나칠 정도로 강력한 집회·시위에 대한 보장을 주제로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면 대부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 답한다. 일종의 자포자기다. 오는 22일 진행될 대통령 선거에 나서는 일부 후보가 시위 장소를 제한하고 강경 통제하겠단 공약을 내걸었지만, 이전 정부에서 실패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불만을 표하면서도 어찌하지 못해 무력감을 느끼는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도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지난달 법원은 표현의 자유 보장과 함께 “편도 4개 차로 중 3개 차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심각한 교통 불편을 줄 우려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민노총의 국회 앞 노숙 집회를 허용했다. 시위로 인해 잦은 차량 통행, 지하철 운행 방해로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한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봤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무력감.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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